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본부장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본부장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필자는 아시아 전역에서 혁신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으로 비상하는 것을 목격해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경제 대국 일본에서 글로벌 신성장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과거 도요타와 소니, 파나소닉과 같은 글로벌 기업을 배출했던 일본 산업계의 혁신성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일본은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특히 로봇, 자동화, 광학, 첨단 부품 등 니치(틈새) 부문에서 많은 일본 기업이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반세기도 더 된, 오래된 기업들이다. 기업 역사가 비교적 짧은 일본 기업 중에 글로벌 성장 산업을 주도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산업별로 한번 살펴보자. 편의상 글로벌 성장 산업을 전 세계 매출 규모 500조원 이상 혹은 이익 규모가 100조원 이상 되는 산업군이라고 정의해 보자. 그러면 반도체,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 소프트웨어(클라우드), 스마트폰, 신약 등이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 대형 산업 리스트에선 일본의 신흥 기업들을 찾을 수 없다.


반도체·플랫폼·클라우드·스마트폰·신약서 존재감 없는 日 기업

반도체 산업부터 시작해보자. 일본 기업들은 1980년대 초만 해도 이 부문 글로벌 점유율이 50%를 넘었다. 하지만 2020년 현재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5%까지 내려앉았다. 반도체를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눠보면 로직칩, 아날로그칩, 메모리, 칩 제조공정(파운드리) 등의 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이윤이 가장 좋은 로직칩 설계 부문은 반도체 산업 초기부터 인텔, 퀄컴, AMD, TI, 엔비디아 등 미국계 기업들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한때 일본이 주도했던 메모리 부문은 한국과 미국 기업에 주도권을 넘겨준 지 오래다. 파운드리 부문은 노동력보다는 공정 관리 능력이 중요하므로 일본이 해볼 만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대만의 TSMC에 밀리기 시작하고서 현재 일본의 파운드리 산업은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

인터넷 기반 비즈니스 모델은 지난 2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기업들이 플랫폼 네트워크 효과를 바탕으로 영업이익률 30% 수준의 고부가가치 사업을 창출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 부문에서 의미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독자 여러분 증 대부분은 일본의 인터넷 플랫폼 혹은 모바일 앱(app) 서비스를 이용해본 경험이 거의 없을 것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기업 경영 효율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를 하는 서비스로, 현재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대형 성장 산업 중 하나다. 이 역시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비(非)일본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스마트폰도 매출 규모로는 대형 산업(매출 700조원가량)으로 손색이 없다. 한때 디지털카메라, 워크맨 등 소비자 IT 제품군을 주도하던 일본 기업들은 스마트폰 부문에서 크게 실패했다. 이제 일본 브랜드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부가가치 산업인 신약도 마찬가지다. 30년 전 인류가 유전자를 다루는 기술을 갖게 된 이후 미국에서는 길리어드, 제넨테크, 바이오젠 등과 같은 바이오 벤처들이 시가총액 100조원 수준의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은 한때 화학약 신약을 주도하던 국가였다. 신약과 관련성이 높은 노벨 의학상, 화학상 부문에서 일본은 수시로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과는 달리 바이오신약 벤처 기업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전히 대형 제약사 중심으로 신약개발 산업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앞으로 대형 산업이 될 가능성이 당연시되는 전기차 배터리 산업도 마찬가지다. 한때 파나소닉, TDK, 소니, 산요와 같은 일본 기업들이 소비재 배터리 산업을 장악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LG화학, CATL 등 한·중 기업들에 주도권을 모두 넘겨줬다.


일본은 보수적인 조직 문화와 혁신적인 벤처 기업의 부재로 글로벌 대형 성장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안개 낀 도쿄 도심 전경.
일본은 보수적인 조직 문화와 혁신적인 벤처 기업의 부재로 글로벌 대형 성장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안개 낀 도쿄 도심 전경.

“도요타 전고체 배터리 개발은 혁신 외면에서 비롯”

일본이 글로벌 대형 성장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을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없을까? 필자가 볼 때 두 가지 중요한 배경이 있다. 첫째는 일본의 특수한 기업 조직문화, 둘째는 일본에 벤처 생태계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먼저 일본 기업들은 수 세대를 지나며 관료화가 심하게 진행됐다. 여기에 더해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가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장 상황에 따라 기업의 내용을 바꾸는 경영 방식이 쉽게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의 최고경영자(CEO)는 적자 사업을 구조조정하기보다는 모든 사업 부문의 동반 생존을 유지할 때 더 칭송을 받았다. 좋게 보면 모든 구성원이 적당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기업 관점에서는 긴급한 문제에 처했을 때 제한된 전략만을 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 기업이 전기차 및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서 보여주는 행동 양식은, 위와 같은 조직문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도요타를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자동차 산업계는 미래 배터리 기술이라고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를 주도하는 것으로 한·일 언론의 하이라이트를 받아왔다. 이들은 전고체 배터리의 미래에 대해 장밋빛 기대를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전문가조차도 전고체 배터리의 글로벌 대량 생산은 2030년 정도가 돼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어떤 기업이 10년 후에나 양산되는 기술을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은 과연 주목받을 일일까? 10년 후에는 그 기술이 대세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도요타는 황화합물에 기반한 전고체 기술에서 앞서 있다. 하지만 최근 미국 벤처 기업 중 다른 방식의 전고체 배터리에서 획기적인 혁신을 이뤄 언론의 뜨거운 조명을 받은 사례도 있다. 즉, 전고체 기술 안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의 대형 배터리 업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에야 주류인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 투자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들은 여기서 대규모 이익을 내고 언젠가 전고체 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것이 당연하다. 어쩌면 기술 개발은 일본 기업들이 하고 실제 대량 양산은 한국과 중국 기업들이 주도할 가능성도 꽤 크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현재 메인 스트림인 리튬이온 배터리 부문에 투자하는 것을 꺼린다. 한때 자동차용 배터리 부문에서 1위였던 파나소닉은 보수적으로 투자를 진행하다 보니 현재 한국과 중국 기업들에 뒤처지고 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이 배터리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는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과거 자동차용 배터리 생산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경험이 있다. 둘째, 하이브리드 부문에서 이미 글로벌 최고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에 순수 전기차에 투자하는 대신 하이브리드 기술 개량에 집중하고자 했다.

하지만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일본이 전기차 산업에 대한 투자를 꺼린 것은 집단주의 조직문화 때문이다. 잘 알려졌듯 전기차는 내연기관 산업계에 파괴적이다.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담당하는 기업과 연구자, 엔지니어 조직에는 치명적인 변화다. 전기차로 이행 때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숫자도 대폭 줄어든다. 이렇게 되면 일본 자동차 산업계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조직문화상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업계에 파문을 일으킬 (소위 파괴적 혁신을 가져오는) 기술을 추구하기보다는, 아주 먼 미래에나 영향을 미칠 원거리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 업계가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선도한다는 것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조직문화가 어떻게 당대의 중요 혁신을 외면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봐야 한다.

둘째, 일본이 대형 신흥 기업을 배출하지 못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일본에 벤처 생태계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기존의 조직을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새로운 기업이 등장해서 오래된 기업을 대체하면 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새로운 기업을 육성하는 문화와 생태계가 발달하지 않았다. 일본 정도의 과학 기술과 고급 인력, 자동차 소비 규모라면 테슬라에 준하는 경쟁력 있는 신기술 자동차 스타트업이 등장할 법도 했다. 하지만 없었다. 참고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의 비전펀드야말로 오늘날 벤처 정신의 상징처럼 됐지만, 막상 비전펀드가 투자하는 일본 벤처 기업은 사실상 없다.

왜 일본에는 벤처 생태계가 없는 걸까? 잘 알려졌다시피 일본인은 보수적인 성향이 짙다. 우수한 인력일수록 평생 고용을 보장하는 대기업 취직을 선호한다. 우수한 경영 인력들이 신생 기업에 참여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둘째, 일본 금융 시스템은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전히 은행 중심이다. 가계는 제로 금리라도 은행에 예금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사업가들도 투자자로부터 출자를 받기보다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을 선호하고 당연시한다. 정부는 자본시장을 규제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특히 비상장주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고 까다로워 벤처 기업들이 자본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벤처 정신과 생태계가 희망

기업 경영이 유연한 조직문화를 갖고 있고 벤처 기업을 육성하는 제도와 문화를 가진 나라들은 따로 있다. 누구나 동의하듯 바로 미국이다. 최근에는 중국이 미국과 비슷한 면모를 자주 보여주고 있다. 현재 중국은 무림 고수가 등장하듯 신생 기업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고, 벤처캐피털이 기다렸다는 듯이 성장 자금을 대준다.

물론 두 나라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유연한 경영 문화와 벤처 문화를 수 세대에 걸쳐 정착시킨 경우라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등장한 창업가 1세대가 아직 기업 경영을 이끄는 단계라서 벤처 문화가 정착했다고 보기는 이르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중간쯤에 있는 듯하다. 몇 세대를 거친 대기업도 많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업가 정신이 강하고 벤처 자본, 전문 인력 등 벤처 생태계가 비교적 잘 마련돼 있다. 사실 한국과 같은 소규모 나라 중에서 글로벌 신성장 산업 곳곳에서 리딩 기업들을 배출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일본의 자산 거품 혹은 고령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1980년대 일본 자산 거품의 규모가 워낙 컸으니 처음 잃어버린 10년에 대해선 부동산 탓을 해도 된다. 하지만 경제 저성장 국면이 10년에서 30년으로 길어진 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일본이 지난 20년간 글로벌 대형 성장 기업들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대 대형 성장 산업에서 글로벌 기업을 배출해야만 비로소 고소득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 경제의 경우 고령화 등 많은 영역에서 일본을 닮았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이 일본의 저성장 30년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은 글로벌 수준의 혁신 기업을 키우는 문화와 관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벤처 정신과 벤처 생태계가 우리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