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을 마친 삼일빌딩 내부. 사진 SK D&D
리모델링을 마친 삼일빌딩 내부. 사진 SK D&D

5월 20일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앞. 검은색 외벽에 네모반듯한 31층짜리 건물이 있다. 직장인들이 오가는 출입구 아래에는 ‘1969. 3. 1.’ ‘2020. 3. 1.’이라고 새겨진 두 개의 머릿돌이 보인다. 국내 최초의 마천루, 대한민국 근대 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아이콘, 바로 ‘삼일빌딩(3·1빌딩)’이다.

1968년에 착공해 1970년에 완공한 삼일빌딩은 1985년 서울 여의도동 63빌딩(한화63시티)이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당시만 해도 삼일빌딩 층 수를 세는 것이 서울 관광 코스 중 하나였다.

연면적 약 3만6000㎡에 110.8m, 31층 높이의 삼일빌딩은 오래됐지만 세련됐고, 단순하지만 정교하다. 한국 대표 건축가 고(故) 김중업(1922~88)씨는 국내 최초로 ‘커튼월(curtain wall)’을 설계에 적용했다. 커튼월은 유리를 사용한 빌딩 외벽 마감을 뜻한다. 철골을 외벽에 노출시키고 철골 사이를 유리로 채우는 방식을 썼다.

이후 50년 만인 2020년 삼일빌딩은 리모델링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건축물로 다시 태어났다. 2018년 삼일빌딩을 매입한 SK D&D와 투자사 벤탈그린오크는 건물 가치를 높이기 위해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했고, 2020년 11월 준공했다.

설계는 정림건축이, 건축 콘셉트 설계 및 내부 인테리어 설계는 원오원아키텍스가 담당했다. 투자를 진행하면서 건축 유산의 가치를 그대로 두고 건축물을 재구성해 가치를 높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0년 삼일대로 앞 ‘맘모스 빌딩’ 등장

‘국내 최고(國內最高)의 삼일빌딩, 18층(層)까지 임대(賃貸)보증금만 4억(億)’ 1970년 6월 5일 조선일보 지면에는 이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원문 그대로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당시 철과 특수강을 생산하면서 방위사업체로 급성장했던 삼미그룹이 사옥으로 쓰기 위해 삼일빌딩 건립 공사를 발주했고,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거장으로 꼽히는 건축가 고 김중업씨가 설계를 맡았다. 그는 김수근과 함께 한국 건축을 이끈 1세대 건축가로, 현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1887~1965)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로 알려졌다.


2021년 5월 서울 종로구 삼일빌딩(3·1빌딩) 전경. 사진 허지윤 조선비즈 기자
2021년 5월 서울 종로구 삼일빌딩(3·1빌딩) 전경. 사진 허지윤 조선비즈 기자

2020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아이콘 돼

지난해 삼일빌딩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삼일빌딩 리모델링은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내·외관의 미적 가치와 기능을 프라임 빌딩급으로 강화하는 게 핵심이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자로 잰 듯한 검은색 격자무늬 디자인과 흰색 조명이 수놓은 천장이 현대적이고 깔끔한 인상과 개방감을 전해줬다. 시선을 사로잡는 원형 계단을 따라가니 과거의 구조물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삼일빌딩의 존재감은 단연 ‘입면성’에 있다고 건축 업계는 설명한다. 입면성이란 건물의 전면, 우측 면, 배면, 좌측 면 등 외관 4면의 모양을 뜻한다. 삼일빌딩은 유리를 고정하는 철제 뼈대를 외부에 드러내고 있다. 건물의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면 외벽에 이런 ‘커튼월 방식’을 적용한 것은 국내에서 삼일빌딩이 시작이었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미스 반데어로에가 설계한 미국 뉴욕 시그램(Seagram) 빌딩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리모델링 설계를 이끈 김해진 정림건축 소장은 “삼일빌딩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외관 디자인과 콘셉트는 김중업 건축가가 최초 설계한 입면 방식과 커튼월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해 고유의 비례미와 정면성(正面性)을 유지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정면성이란 정면에서 바라본 건축물의 가치를 뜻한다. 건물의 대표 이미지, 얼굴인 셈이다.

다만 선결과제가 있었다. 지난 세월만큼 철제에 손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전진단을 통해 커튼월 외부의 패널과 형강에서 녹 얼룩과 누수 현상이 확인됐다. 이에 외부 구조재를 교체하고 900mm 간격의 ‘I 형강’ 사이 내부에 단열 처리된 부재를 설치해 단열·차수를 강화하는 등의 작업이 이뤄졌다.

이 같은 리모델링을 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 있는 건축물인 데다 빌딩의 외관 골조 등이 현대식 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미적으로 우수했다. 또 용적률은 1711%, 높이 110.8m, 31층으로, 신축할 경우 최고 높이 70m, 허용 용적률 600% 등으로 현재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는 점이 있어 경제적으로도 리모델링으로 추진하는 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낮은 층고 한계 속 새로운 변화

반세기 만에 진행된 리모델링은 과거의 김중업과 현대의 건축가들 간의 끊임없는 대화였다. “31층의 높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보를 뚫고 덕트를 배열해 날씬하게 보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김중업 건축가는 삼일빌딩 설계에 대해 이같이 회고한 바 있다. 정해져 있는 건물 높이 안에서 31층을 맞춰야 하다 보니, 낮은 층고와 공간 확보의 한계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건축설계사의 깊은 고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0년 뒤 리모델링을 진행하게 된 설계사들도 층고의 한계를 해결하는 것이 숙제였다. 김해진 소장은 “옛 건물이다 보니 층고의 한계가 있었다”라며 “기준 층 층고가 3.3m, 천장고 2.3m로 낮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피스 공간의 엘리베이터(EV) 홀 주변에만 최소 설비 배관 등을 집중시켜 천장 공간을 낮게 만들고, 나머지는 개방형(오픈) 천장으로 만들었다”라고 했다.

거리에서 들여다보이는 로비와 ‘선큰(sunken)’ 공간은 새로운 변화다. 선큰은 지하에 자연광을 유도하기 위해 대지를 파내고 조성한 공간을 말한다. 1969년 3월 개통된 삼일고가도로가 건물 정면의 저층부를 가로막고 있다가 이후 삼일고가가 철거되고 청계천 일대가 복원됐다. 이런 변화에 맞춰 저층부 설계에 공을 들였다. 실제 청계천에서 보면 삼일빌딩 로비와 저층부의 격자무늬 천장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김해진 소장은 “외부에서 볼 때 통일성 있는 조명이 보이도록 해 개방감을 강화했고, 지상 1, 2층에서 지하 1, 2층까지 일체형 커튼월과 선큰 가든이 이어지도록 설계해 청계천에서 건물 내부가 연결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배준범 SK D&D PM은 “50년 전 외부 노출 철재 소재의 커튼월 시스템의 콘셉트와 디자인을 유지한 채로, 현대적 소재와 기술을 더해 현대적 건축물로 탈바꿈시켰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