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하루히코(黒田東彦) 일본은행 총재. 그는 4월 28일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끈질기게 이어가겠다”며 “(0.25% 이율로 10년물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는) ‘연속 지정가격 오퍼레이션’을 (특정일이 아니라) 매일 실시하겠다”고 말해 시장을 아연케 했다. 통화 정책 운영을 심의·결정하는 금융정책결정회의(한국의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회의와 비슷)가 끝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였다. 사진 블룸버그
구로다 하루히코(黒田東彦) 일본은행 총재. 그는 4월 28일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끈질기게 이어가겠다”며 “(0.25% 이율로 10년물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는) ‘연속 지정가격 오퍼레이션’을 (특정일이 아니라) 매일 실시하겠다”고 말해 시장을 아연케 했다. 통화 정책 운영을 심의·결정하는 금융정책결정회의(한국의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회의와 비슷)가 끝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였다. 사진 블룸버그
최원석 조선일보  국제경제 전문기자 온라인 칼럼 ‘최원석의  디코드’ 필자, ‘테슬라 쇼크’ ‘왜 다시 도요타인가’ 저자, 전 ‘이코노미조선’ 편집장
최원석 조선일보 국제경제 전문기자 온라인 칼럼 ‘최원석의 디코드’ 필자, ‘테슬라 쇼크’ ‘왜 다시 도요타인가’ 저자, 전 ‘이코노미조선’ 편집장

새로운 공포가 일본을 엄습하고 있다. ‘슈퍼 엔저(엔화 가치 폭락)’의 공포다. 엔화 환율이 달러당 130엔(약 1170원)을 넘었다. 달러당 140·150엔대까지 엔화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그러나 환율조정 수단을 가진 일본은행(일본의 중앙은행, 이하 일은)은 급격한 엔저를 방치하는 양상이다. 4월 28일 구로다 하루히코(黒田東彦) 일은 총재는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끈질기게 이어가겠다”며 “(0.25%

이율로 10년물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는) ‘연속 지정가격 오퍼레이션’을 (특정일이 아니라) 매일 실시하겠다”고 말해 시장을 아연케 했다. 이는 10년물 국채 금리가 0.25% 이상으로 오르는 것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즉 시장에 맞서 국채 가격 방어전의 화력(火力)을 최대로 높이겠다는 뜻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이미 큰 폭의 금리 인상을 예고했기 때문에 미·일 금리 차는 커질 전망. 금리 차가 커지면 엔저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구로다의 발언은 충격인 동시에 일은이 처한 딜레마를 대변한다. 왜 그런지를 알려면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채(정부가 발행한 채권) 가격 폭락의 위험성은 2012년 말 아베 신조 정권 출범 이후 시작된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의 ‘급소’로 꼽혔는데, 특히 무서운 게 장기국채(10년물) 금리의 급등(가격 폭락)이다. 일본 장기국채 금리는 작년 말까지 사실상 제로(0)였는데, 슬금슬금 올라 최근에 일시적으로 0.25%를 넘었다.

국채(가격) 폭락 경고는 반복됐다. 채무 불이행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유에서다. 계속 느는 일본 국가 부채는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260% 수준으로 세계 최악이다. 그러나 우려가 커지고 헤지펀드가 국채 매도에 나설 때마다 일본 기관투자자가 국채를 사들였기 때문에 폭락 우려는 기우로 끝나곤 했다.



日銀의 무제한 국채 가격 방어가 엔화 약세에 방아쇠 

2016년에 다시 문제가 터졌는데, 일본 최대 민간은행이자 국채 매입 ‘큰손’이었던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이 사실상 국채 매입을 중단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일본 대형 금융기관으로는 처음이었는데 이후 다른 은행도 뒤를 따랐다. 민간은행이 정부와의 공조를 깬 것은 당시 일은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해 민간은행 수익성이 크게 악화했기 때문이었다. 국채를 떠안을 여력이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GDP가 성장하지 못하면서, 정부의 빚(국채) 갚을 능력에 대한 불안이 커진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런 위기도 봉합되는 듯 보였다. 민간은행 대신 일은이 국채를 사들여 가격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채 폭락 위기를 뒤로 미룬 것이었다. 일은이 일본 정부 국채 발행량(약 1000조엔·약 9000조원)의 절반을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의 금리 차 확대와 무역·경상수지 적자(쌍둥이 적자)가 동시에 일어나 지금의 급격한 엔저가 발생한 것이다.

엔화 약세장을 방치하면 엔화 가치 추가 하락을 예상한 엔화 매도가 늘어난다. 매도가 늘면 엔화가 더 약세(엔저)로 가는 악순환이다. 그런데도 일은이 이 악순환을 끊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제한 금융완화 과정에서 통제 수단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정책의 결과가 일은의 목까지 겨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장기금리 상승은 일은 보유 장기국채의 평가손 발생, 일은의 엄청난 채무 초과로 이어질 수 있다. 작년 6월 말 기준으로 일은은 529조9000억엔(약 4769조원)어치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94%인 499조2000억엔(약 4492조원)어치가 장기국채다. 

2021년 상반기 일은이 보유한 장기국채의 평균 이율은 0.226%였다. 10년물 국채 금리가 0.25%를 넘어 0.3%, 0.5% 수준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금리 상승은 국채 가격 하락을 의미하고, 하락으로 인한 차액만큼 평가손이 발생한다.


국채의 절반 떠안은 日銀의 딜레마

일은은 주식·채권의 평가 손익을 매년 5월 말 발표하기 때문에, 최소한 이때까지라도 장기금리를 억제해야 한다. 실패하면 당장 이달 말에 문제가 터진다. 채권이 크게 평가절하됐다고 발표하면, 세계의 언론·신용평가회사·외국은행 등이 발칵 뒤집힐 수 있다.

물론 양적·질적 완화 정책이 일본 정부의 디폴트 위험을 낮추고 일본의 GDP 성장을 도모할 시간을 벌어준 측면도 무시할 순 없다. 다만 정부 빚을 중앙은행이 떠안은 상황을 언젠가는 해소해야만 하는데, 그 출구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급격한 엔저를 맞은 것이다.

일은의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해외 금리 상승, 국내 인플레 등에 대비해 단기 정책금리를 올려야 할 수 있는데, 당좌예금 금리를 올리는 방법밖에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일은 당좌예금 잔고는 543조엔(약 4887조원)이나 된다. 일은 당좌예금이란 민간은행 등이 일은에 개설하는 예금이다. 규정에 따라 민간은행은 가계·기업으로부터 맡은 예금액의 일정 비율을 일정 기간 일은 당좌예금에 적립해야 한다. 이렇게 의무인 금액이 법정 준비액이고, 그것을 넘는 부분은 초과 준비액이 된다.

일은 당좌예금이 543조엔이나 되는 것은 초과 준비액이 눈덩이처럼 불었기 때문이다. 양적·질적 완화란, 일은이 민간은행이 보유한 장기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돈을 푸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일은이 그렇게 공급한 돈이 시중은행의 여신 확대에 쓰이지 않고 단순히 민간은행의 일은 당좌예금 계좌에 초과 준비액으로 쌓여버린 것이다.


통화 정책 ‘묘수’도 성장 뒷받침 없으면 백약이 무효

2016년 초 마이너스 0.1% 금리가 도입됐으니 일은으로선 이자 부담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정 준비액은 강제이기 때문에 무이자이지만, 초과 준비액에는 현재도 연 0.1% 이자가 붙어 일은으로부터 민간은행에 이자가 지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은 당좌예금 중 마이너스 금리 적용분은 5.3%에 불과하고, 55.5%는 제로금리, 나머지 40%가량은 연 0.1% 금리가 민간은행에 지급되고 있다. 작년 일은의 당좌예금 이자 지급 비용은 2179억엔(약 1조9000억원)이었다.

일은이 출구전략을 쓰려면 당좌예금에 쌓이는 초과 준비액이 시중에 유출되지 않도록 당좌예금 금리를 올려야 할 수 있다. 당좌예금 금리를 1%로 올리면, 현재 당좌예금 잔고가 543조엔이니까 단순 계산으로 이자 비용만 5조엔(약 45조원)이다. 가토 이즈루(加藤出) 도탄리서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주간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작년 일은의 경상이익이 2조엔(약 18조원), 순자산은 4조5000억엔(약 40조5000억원)이니까, 약간의 금리 인상으로도 일은이 엄청난 채무초과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썼다.

즉 일은이 금융 긴축을 하면 일은 자신이 엄청난 채무초과에 빠져 버린다. 채무초과는 중앙은행의 신용을 추락시킬 수 있고, 그런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통화는 폭락 가능성이 커진다. 채무초과를 무서워해 긴축을 회피하면 미·일 금리 차 확대로 엔화 약세가 더 심해질 수 있다.

이것이 일은이 급격한 엔저에 속수무책인 이유다. 구로다 일은 총재의 양적·질적 완화가 통화 정책의 혁명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라는 사실만 드러나고 있다. 일본이 택한 그 ‘묘수’가 슈퍼 엔저의 공포로 바뀌기 시작했다.

최원석 조선일보 국제경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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