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롯데는 ‘신동빈 부회장 시스템’이 본격 가동된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정책본부가 그 신호탄이다. 그룹을 이끌어갈 조타수 역할을 하는 정책본부장에 신동빈 부회장이 전격 기용됐다. 신격호 롯데 회장(사진)은 올 신년사에서 ‘혁신’이란 화두를 던지며 차남 신동빈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신중한 투자 기조를 유지하되, 글로벌 시장 공략의 폭은 넓혀야 할 것입니다. …(중략)…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혁신은 기업의 필수적인 생존 전략입니다. …(중략)…그 무엇보다도 정책의 우선순위를 인재 발굴과 육성에….”

 신격호(83) 롯데 회장이 2005년 신년사에서 ‘혁신’이란 화두를 들고 나왔다. ‘글로벌’과 ‘인재’는 지난해에도 강조한 것이지만 혁신은 2002년 이후 3년 만에 재등장한 용어다.

 평소 내실을 강조해온 신 회장이 혁신을 주문한 것은 ‘변화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재계에서는 “세 단어로 표현된 신년사 키워드 가운데 ‘혁신’은 내부용이고 ‘글로벌’과 ‘인재’는 사업용”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내부용이란 차남인 신동빈(50) 부회장을 중심으로 경영권 이양을 가속화하는 ‘조직 재편용’이란 뜻이다.

 지난해 10월 그룹 헤드쿼터를 경영관리본부에서 ‘정책본부’로 재편한 게 시발점이다. 정책본부는 타 그룹의 구조조정본부 역할을 하는 롯데 경영의 컨트롤 타워다. 그때 정책본부장에 신 부회장을 앉힌 것도 그룹 경영을 ‘신동빈 체제’로 바꿔 놓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던 셈이다. 경영관리본부장이던 신 회장의 ‘영원한 참모’ 김병일 호텔롯데 사장을 신동빈 본부장 직속 부본부장으로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원한 참모’ 김병일 사장이 부본부장

  특히 신년사에서 “정책본부 출범은 혁신의 시작”이라고 강조한 데서 신 회장의 의중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특히 ‘안으로부터의 혁신’을 강조, 개혁 방향이 신 본부장 체제로 진행됨을 암시하기도 했다.

 신 회장은 또 “지난해 핵심 업종의 경쟁력을 한 단계 올려놓았고 신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발굴했다”고 치하했다. 이 역시 신 부회장을 띄우는 발언이다. 신 부회장이 공동 대표로 있는 호남석유가 지난해 KP케미칼을 인수한 것과 신 부회장이 들여온 일본 의류브랜드 유니클로, 크리스피 크림 등 신규 사업에 대한 칭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05년은 롯데그룹이 ‘신격호 체제’에서 ‘신동빈 시스템’으로 바뀌는 원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신 회장은 지난 2월4일 10개 계열사 대표를 바꾸고 임원 86명을 승진시킨 사상 최대의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이를 놓고 롯데그룹을 잘 아는 재계의 한 관계자는 “신 부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정책본부 출범 완료의 ‘축하파티’ 성격이 짙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2월 최대 임원 인사는 ‘축하 파티’

 신 회장이 혁신이란 화두로 신 부회장 체제로의 무게중심 이동에 신년사 절반을 할애했다면 나머지 절반은 ‘사업용’ 멘트라는 게 재계 해설이다. 글로벌과 인재 육성을 강조한 대목이 그렇다.

 여기엔 신 회장의 고민이 배어 있다. 사실 롯데는 이렇다 할 스타급 인재가 드물다. 97년 당시 최연소로 대표로 취임, 9년째 그룹 간판 회사인 롯데쇼핑을 이끌고 있는 이인원(58) 사장이 고작이다. 임승남(67) 전 롯데건설 사장(현 우림건설 회장)도 지난 연말 떠난 상태다. 지난 인사 때 신임 계열사 대표 3명이 모두 외부 영입파라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25년간 ‘신세계맨’으로 조선호텔 사장을 지낸 장경작(62) 롯데호텔 사장, 시큐아이닷컴 대표를 지낸 오경수(49) 롯데정보통신 대표이사 전무, 경인방송 대표를 지낸 박광순(56) 대표이사 상무가 그들이다. 신 회장이 매년 신년사 레퍼토리처럼 ‘인재 육성’을 외쳤던 이유다. 3명 모두 신 부회장이 정책본부장에 오른 후 기용됐다는 점에서 신 부회장을 배려한 용병술로 보여진다.

 이와 함께 롯데가 글로벌 경쟁력에서 재계 톱 10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신 회장을 고민스럽게 한다. 현재 롯데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프로젝트는 러시아 현지 법인 ‘L&L’이 짓고 있는 호텔과 백화점·오피스 복합빌딩 사업. 이를 위해 총 4억 달러에 달하는 실탄을 준비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2006년에야 완공되는 ‘미래형’ 사업일 뿐이다.

 롯데칠성의 수출망은 현지 지사가 아닌 대리점 라인에 불과하다. 현재 롯데의 해외 네트워크는 롯데제과가 지난해 5월 인도 첸나이 소재 캔디회사인 패리스 사를 인수한 것과 롯데마트가 지난해 2월 중국 상하이에 사무소(총 직원 5명)를 개설한 정도다.



M&A 로 성장 동력 찾아라

 그나마 유화 3사(호남석유, 롯데대산, KP케미칼)가 글로벌 체계를 구축해 놓고 있다. 현재 중국과 홍콩, 대만, 일본, 인도네시아,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 지사를 운영 중이다. 그러나 롯데측은 글로벌 경영과 관련, “현재 중국에 테마파크 진출을 검토 중”이라며 신회장의 글로벌 경영 선언을 뒷받침할 ‘재료 찾기’에 분주하다.

 신 회장이 글로벌을 강조하는 것도 롯데 38개 계열사 사업 분야가 내수에 치중돼 있기 때문이다. 롯데그룹의 사업군은 크게 보면 유통/관광 부문(롯데쇼핑, 롯데호텔, 롯데월드 등)과 식품 부문(제과, 칠성, 롯데리아 등), 중화학/건설/기타 부문(캐논, 건설, 기공, 호남석유 등) 등이다. 문제는 3개 분야 모두 고성장 산업군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5년 뒤, 10년 뒤 그룹을 끌고 갈 미래 산업이 마땅치 않다는 게 롯데의 고민이다. 신 회장은 이를 타개할 비책으로 기업 인수 합병(M&A)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 2001년 이후 매년 1~3개 기업씩 인수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2001년 2월 제일제당 음료사업부문 인수를 필두로 TGIF, 미도파백화점, 동양카드(이상 2002년)에 이어 현대석유화학(2003년, LG석유화학과 공동), KP케미칼(2004년) 등을 인수해 왔다. 지난 4년간 총 8개사 인수에 투자한 실제 금액만 1조5700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까지 막후 조율자로 인수 합병을 지휘하던 신 부회장은 올해부터는 총사령탑으로 전면에 나선다.

 지난해 최고 성공작으로 꼽히는 KP케미칼 인수도 사실 그해 3월부터 호남석유 공동대표를 맡았던 신 부회장의 작품이라는 것이 롯데측 전언이다.

올 들어서는 지난 2월14일에 2005년 최대 기업 매물로 꼽히는 진로 인수에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게 첫 출발이다.

 신 부회장은 평소 ‘거화취실’(去華就實)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 화려한 포장을 멀리하고 실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돌다리도 두 번 세 번씩 두드려 건넌다는 신 회장과 닮은꼴이다.

 이런 그에게 인수 합병을 통한 사세 확장은 물론 인재 육성과 글로벌 경영 가속화 등 롯데의 숙원 과제가 맡겨졌다. 그 변화를 신격호 회장은 차남 신 부회장에게 정책본부장이란 칼자루를 쥐어주면서,‘안으로부터의 혁신’이라 칭한 셈이다. 신 회장은 ‘혁신’ 화두를 던진 직후 일본에 건너간 후 2월 말 현재까지 일본에 체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