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액 기준 국내 50위 안에 드는 제조업체인 T산업의 마케팅팀장 O차장은 2003년 연말 즈음 풀기 힘든 숙제를 맞이하고 있었다. O차장은 2003년 초 정기 인사에서 마케팅팀장의 직책을 보임 받아 1년간 열심히 일해 온 터였다. 그러다가 연말 인사 고과 시즌이 되었는데, 그 동안 피평가자의 입장에서 인사 고과를 받아 본 적은 있어도 평가자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심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지난 1년간 팀원들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 왔는데, 회사에서는 엄격한 상대 평가를 요구하고 있어서 막상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가 결과에 따라 팀원들의 승진이 좌우되고 내년도 급여 수준도 달라지기 때문에 함부로 평가 등급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 팀원이었던 시절부터 ‘우리 회사는 공정한 인사 고과가 안 된다. 팀장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던 O차장인지라 그 갈등의 폭은 더욱 깊었다.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O차장이 내린 결정은 결국, 올해 승진 대상자인 2년 후배 O과장에게 최고 등급을 주고 나머지 직원들은 승진 시까지 남은 연차 순으로 적절히 평가 등급을 배분하는 것이었다. 평소의 소신과는 달리 막상 팀장이 되어 보니 공정한 인사 고과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한 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인사 고과? 형식적인 것 아냐?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기업에서 시행되었던 소위 ‘인사 고과’는 거의 대부분 형식적인 연례행사에 그치지 않았다고 단언해도 큰 무리는 없다. 합리적 성과 관리 시스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개선의 노력을 쏟아 온 일부 기업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 기업들은 사례와 같은 현상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제 12월이 되어 많은 기업들이 인사 고과 시즌을 맞이하고 있는데 올해도 역시 이런 문제로 인사부서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사 고과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을 같이하고 있다. 고과는 공정해야 하고 실제 업무 성과를 적절히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다. 인사부서에서는 공정한 인사 고과의 중요성을 매년 평가자들에게 강조하고 이에 대한 많은 교육도 실시하곤 하지만, 결국 공정하고 적절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사실 매우 드물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인사 고과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잘못된 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승진 대상자에 대한 점수 관대화 경향(온정주의). 둘째, 연차가 높은 사람에 대한 점수 관대화 경향(연공주의). 셋째, 부서원 전체에 대한 관대화 경향. 넷째, 부서원 전체의 평가 점수를 평균 점수대로 조정하는 현상.

 이 4가지의 대표적 사례 중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사례에서 본 것처럼 승진 대상자에 대한 고과 점수 관대화 경향이다. 이러한 현상은 ‘승진이 곧 급여 인상’인 우리의 직급·보상 구조에 주로 기인한다. 승진을 하지 못하는 경우 다른 동료 직원들에 비해 매우 낮은 급여 수준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평가자들이 승진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높은 고과 점수의 혜택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다른 피평가자들이 낮은 고과 점수를 받아야 하는 반대급부 현상을 야기한다.

 이러한 승진 대상자 중심, 연공 중심의 인사 고과 행태가 인사 시스템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특히 이러한 인사 고과 경향의 원인이 되는 승진 중심의 사고가 인사 시스템 내부에서 형성하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는 우리 기업의 인사 시스템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종양과도 같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악순환 구조에는 직원들의 ‘승진 중심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승진 중심 사고로 인해 인사제도의 기본인 평가제도가 본연의 기능을 잃게 되고, 결국 보상제도마저 원래의 동기 부여 기능을 잃게 되는 사슬 구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우리가 어떻게 승진 중심 사고를 보다 합리적이고 성과 중심적인 사고로 전환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더 이상 두더지 게임 안 된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예전 오락실 앞에는 한 마리씩 무작위로 튀어나오는 두더지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길거리용 게임이 한두 대씩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한 마리씩 천천히 나오다가 차츰 레벨이 올라갈수록 간격이 짧아지고 빨라져 레벨 클리어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러한 두더지 게임과 유사한 현상이 최근 우리 기업 인사 시스템에서 많이 발견된다. 특히 인사 고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이 이러한 현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공정한 인사 고과가 잘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기업들이 많이 취하고 있는 대안 중 하나가 엄격한 목표 관리 시스템(MBO) 도입이었다. 연초에 피평가자와 평가자가 목표를 설정하고 합의한 뒤, 연말에 이러한 목표 대비 달성도를 기준으로 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진 중심 사고의 뿌리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승진 대상자에게 달성하기 쉬운 목표 과제를 주거나, 아예 연초의 목표 설정 과정 자체를 따르지 않는 모습으로 또 다른 왜곡을 낳고 있다. 승진 중심 사고를 성과에 따른 보상 중심 사고로 전환하기 위해 평가 결과에 따른 급여 차등 폭을 대폭 확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평가 결과에 대한 직원들의 수용성이 극히 낮은 현실에서 이러한 대안은 오히려 직원들의 불만을 야기할 소지가 크다. 즉,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대안을 도입하면 또 다른 곳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문제로 변하여 튀어나오는 두더지 게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승진 중심 사고를 해소하고 인사 고과의 공정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두더지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선순환의 고리를 아예 통째로 새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덤벼야 한다.

 우리나라 인사제도의 근간을 이루어 왔던 독특한 직급·승진 체계는 최근 우리 기업들이 추구하고 있는 성과주의 인사 시스템에는 다소 불일치하는 면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낮은 직급에서는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상위 직급 급여 수준과는 큰 격차를 나타내는 직급 간 급여체계가 그것이다. 이는 결국 승진 중심 사고를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공정한 인사 고과, 나아가 성과주의 인사 시스템의 구현을 위해서는 인사 시스템 전체에 대한 통합적인 개선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이는 개선이라기보다는 혁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더 이상 두더지 게임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