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재계는 물론 금융권에서는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 논란’이 핫이슈다.
국내 시중 은행들이 잇따라 외국자본에 넘어가고 손바뀜(매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국부 유출 등 부작용이 발생하면서 ‘산업자본의 참여’라는 대항마론이 부각되고 있는 것.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 규제를 더욱 보강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면서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 논란’이 종지부를 찍나 했지만
법안의 취지와 의도와는 반대로 시장에서는 이제는 ‘족쇄를 풀어야 할 때’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과연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에 대해
시장에서는 어떤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지
금융 전문가와 당사자인 은행 경영진들로부터 들어봤다.
 난 1월10일 뉴브리지캐피털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에 제일은행을 매각하면서 5년 만에 1조1500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 지난 2000년 뉴브리지캐피털이 제일은행을 인수한 금액이 5000억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5년 사이 230%가량의 대박을 터트린 것. 더구나 뉴브리지캐피털이 법인 등록을 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라부안은 한국과 이중과세방지협약이 체결돼 있어 세금 한 푼 없이 대박을 챙겨갈 수 있게 됐다. 이에 반해 정부는 그동안 17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투입하고도 5조 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고, 이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됐다.

 제일은행 매각과 관련해 시중 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제일은행 매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것과 같다”며 “헐값 매각 시비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도 5조 원의 손실을 입었던 것은 정부의 은행 민영화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단순 손익 비교로만 봐도 제일은행 매각은 완전한 실패작이었다는 것이 금융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헌재 부총리마저도 제일은행 매각이 선진 금융기법 도입이라는 정부의 기대는 하나도 얻지 못하고 실패한 뼈아픈 교훈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같은 실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금융 전문가들은 정부의 무능한 대외 협상력에도 문제가 있지만 산업자본에 대한 고정관념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다시 불거지는 산업자본 대항마론

 제일은행 매각 당시 여신업무를 담당했던 한 실무자는 “제일은행 매각 당시 매각대금 5000억 원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내자본(산업자본, 연기금)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며 “하지만 정부가 국내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전면 금지하면서 은행업에 관심을 가졌던 대기업에는 제일은행이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고 회고했다. 즉 외국자본과 산업자본과의 역차별 구조가 금융시장 왜곡, 국부 유출 등 부작용을 발생시켰던 원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외국자본과 국내 산업자본의 역차별적 규제는 심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 제한 및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이다. 국내 산업자본은 은행 지분 취득 한도가 4~10%, 금융계열사 의결권도 30% 이내로 제한돼 있지만 외국자본은 금융감독위원회의 승인만 있으면 아무런 제한 없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차별적 규제로 사실상 국내 산업자본은 은행업 진출이 불가능한 상태다. 더욱이 공정위는 재벌 규제를 한층 강화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해 놓은 상태다.

 이에 재계는 물론 금융권에서도 재벌의 은행 진출에 대한 정부의 논리가 아직도 80년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 금융권의 한 원로는 “과거 재벌의 은행 진출 규제는 기업의 투명성이나 자율성, 독과점 등 많은 폐해가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되고 글로벌 기준에 맞는 기업 경영이 이루어지는 현시점에서 재벌의 사금고화, 은행의 집중화 등에 대한 정부의 우려는 정부 스스로가 정책 입법 및 관리 감독자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제일은행과 같은 사례는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비일비재했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시티그룹에 한미은행을 매각한 칼라일이나 외환은행의 대주주로 있는 론스타 등이 대표적인 사례. 더욱이 시중은행의 평균 외국인 지분율은 60%가 넘어 언제든지 외국자본에 넘어갈 수 있는 상태다. 이에 따라 금융권에서는 외국자본이 금융시장의 중추인 은행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금융주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재벌 무서워 금융주권을 넘기나”

 정부도 외국자본에 의한 금융시장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사모주식펀드(PEF)를 도입, 대항마 육성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은행 지분 소유 제한 등 여러 가지 제약에 묶여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자본이 PEF 설립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PEF를 통한 은행 지분 소유 시 은행업법상의 규제(10% 지분 소유 불가)를 그대로 적용받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금융권은 물론 학계에서도 “정부가 재벌 무서워 금융주권을 외국자본에 넘기려 한다”는 비난을 하고 있다.

 선우 석호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은행 민영화와 관련해 “국내 산업자본, 즉 재벌들에게 은행업 진출을 개방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과 부적격 주주에 대한 처벌 강화 등으로 해소할 수 있다”며 “20세기 유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국내 금융시장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금융 구조의 효율화 방향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국자본을 견제하고 산업과 금융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내 산업자본의 지분 소유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국내자본이 금융 시장 내에서 외국자본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아쉬운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정부 내부에서도 산업자본의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인원 예금보험공사 이사장은 “산업자본의 금융기관 소유를 제한하고 있는 ‘4%룰’이 존재하는 한 토종자본으로의 매각이 쉽지 않다”고 전제하고 “적게는 몇 백억 원, 많게는 몇 천억 원을 투자하면서 고작 4%의 지분만 가질 수 있다면 누가 매입에 나서겠는가”라며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경제자문위원회도 “국내 은행에 대한 외국자본 비중을 감안할 때 앞으로 은행 민영화의 주체는 국내자본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청와대에 건의한 상태이다.

임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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