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평소보다 두 시간 빠른 퇴근길이었다. 태풍 상륙으로 인해 교통편이 마비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기 퇴근 지시가 내려왔다. 아내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가능하면 물과 포장 테이프, 식료품을 사다 주세요. 현금도 인출하시고요.”

수퍼마켓에 들어서니 긴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생수와 빵을 파는 매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간신히 탄산수 한 박스를 찾아 카트에 욱여넣었다. 끓는 물이 필요한 라면과 냉동식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연재해를 많이 겪어본 일본인은 상온 보존이 어렵거나 조리가 필요한 식료품은 사지 않았다. 표정은 급해 보였지만 질서와 품위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차 안에 흐르는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조금은 상기된, 하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목소리로 태풍의 진행 방향과 강수량, 피난 시 주의사항을 거듭해 읊었다. 외출을 삼갈 것. 정전과 단수에 대비해 간이 식료품과 마실 물을 챙겨놓을 것. 창문이 깨지지 않도록 테이프와 비닐로 보강 처리할 것. 휴대용 배터리를 챙길 것. 휴대전화는 요긴한 통신수단이므로 배터리 소모를 막기 위해 화면 밝기를 줄이고 애플리케이션 사용량을 확인할 것….

집에 도착하고는 무척 분주했다. 아내와 함께 집 안의 모든 창문에 포장 박스를 덧대고 유니언잭(영국 국기) 형태로 테이프를 발랐다. 마당에 있는 자전거와 휴지통이 날아가지 않도록 기둥에 노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물이 새어 들어올 법한 곳에는 둘둘 만 신문지를 놓았다.

피난 지시가 나오면 언제라도 들쳐 메고 나갈 수 있도록, 귀중품과 식료품을 챙겨 넣은 배낭을 현관 앞에 놓았다. 수동 발전이 가능한 라디오 겸용 회중전등, 헬멧, 비닐 시트도 미리 챙겨두었다. 단수를 대비해 집에 있는 물병은 물론이고 양동이, 그릇, 컵을 죄다 꺼내 물을 채웠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비롯해 숱한 자연재해를 직간접적으로 겪어 온 아내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숙련된 교관이 시범을 보이듯 준비사항을 하나씩 이행해 갔다. 당장 세상에 괴멸적 타격이 온다고 해도 아내의 말을 따르면 무사할 것 같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생각을 되뇌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창밖에 내리던 비는 조금씩 굵어지더니 이내 세찬 폭우로 바뀌었다. 우박이 떨어지는 듯한 빗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강풍이 불어왔다. 이층집이 삐걱거리며 흔들릴 정도로 거셌다. TV에 비친 도쿄의 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았다. 관동 지역을 통틀어 열차와 비행기의 정상 운항 편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회사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내일은 출근하지 말고 자택에서 대기할 것.’ ‘태풍으로 당분간 출근이 어려울 경우 속히 연락할 것.’ TV에서는 강의 범람으로 유난히 피해가 컸던 도쿄도 다마가와(多摩川) 인근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속보가 흐르고 있었다. 가나가와현 무사시코스기의 초고층 아파트는 지하 배전반이 침수돼 엘리베이터 운행이 정지됐다. 47층에 사는 주민은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와야 했다.

이윽고 필자가 사는 곳에서 불과 10여 분 거리의 마을에 대피령이 내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쿄 인근 지바(千葉)현에 규모 5.7의 지진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출렁거리던 집에 더 큰 흔들림이 밀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극성스럽다 싶던 아내의 행동은 전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피난을 갈 수 있도록 외출복을 차려입고, 아내와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피해가 생기면 보험을 어떻게 신청할지를 알아보고, 피난소에는 애완견을 데려갈 수 없다는 규정에 분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우리의 보금자리는 발코니에 조금 빗물이 들이친 것 빼고는 무사했다.

10월 12일 도쿄 도심을 비롯한 일본 관동지역을 강타한 19호 태풍 ‘하기비스’는 1958년 12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태풍 ‘아이다’ 이래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되며 상당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겼다. 10월 29일 기준으로 사망자 88명, 행방불명 7명으로 집계됐다. 도쿄와 가나자와를 잇는 호쿠리쿠 신칸센은 열차 3분의 1이 침수되는 손실을 입었다.

일본에서 지난 수년간 겪은 자연재해 중 가장 피부에 와닿는 경험 속에서 끝없이 감탄했고 끝없이 당황했다. 일반 주민이 훈련받은 생도와 같은 자세로 일사불란하게 재해에 대비하는 모습과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에서 백만 단위의 수도권 주민에게 자연재해를 이유로 피난을 지시하는 상황이 맞물려서다. 집은 아무리 흔들려도 고도의 내진 설계 덕분에 거센 태풍과 지진을 견뎌냈지만, 수조원에 달하는 최신형 열차 10대가 속수무책으로 고철 덩어리로 변하는 모습을 봤다.


10월 13일 태풍 하기비스의 영향으로 하천 시나노가와(千曲川)가 범람하며 물에 잠긴 나가노(長野)현 나가노시. 사진 연합뉴스
10월 13일 태풍 하기비스의 영향으로 하천 시나노가와(千曲川)가 범람하며 물에 잠긴 나가노(長野)현 나가노시. 사진 연합뉴스

도쿄, 안전하지만 위험한 도시 1위

일본은 치안과 보안, 의료 수준과 인프라의 안전성 같은 지표를 놓고 보자면 ‘안전한 나라’에 속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싱크탱크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2년마다 발표하는 ‘안전한 도시 지수 2019’ 보고서에 따르면 도쿄는 3년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런데 지진이나 태풍 같은 재해를 겪다 보면 ‘이곳이 정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막대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보험회사의 판단이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영국 보험 회사 로이즈가 케임브리지 대학과 공동으로 분쟁이나 재해의 위협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도시별 리스크 조사에 따르면 도쿄는 가장 위험한 도시 1위에 올랐다. 일본 대기업은 핵심 자원과 주요 사업장을 도쿄가 속한 관동지역 못지않게 오사카가 속한 관서에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해라는 속설도 있다.

결국 도쿄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지만 가장 위험한 도시라는 얘기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나라에 가득한 이중성과 모순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얼굴을 가진 나라에서, 아내와 나와 강아지는 오늘도 별일이 없길 바라며 마당을 쓸고 창문을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