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이 3월 11일 100만 명분의 코로나19 검사 키트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가 비난 여론에 철회했다. 사진 연합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이 3월 11일 100만 명분의 코로나19 검사 키트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가 비난 여론에 철회했다. 사진 연합뉴스
이진석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제발 의료 붕괴를 일으키지 말아 달라.”

일본의 한 트위터 사용자가 간이 유전자 증폭 검사(PCR) 키트 100만 명분을 무상 지원한다는 계획을 밝힌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에게 보낸 메시지다.

손 회장은 3월 11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지를 위해 대규모 무상 검사를 제안했다가 거센 반발에 시달렸다. 간이 PCR의 신뢰도가 낮은 상황에서 확진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 사회적 충격이 클 것이라는 주장이다. 더 큰 이유는 최근 일본 국민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확진자가 넘쳐나면 일본의 의료체계가 붕괴된다’는 불안 때문이다. 손 회장은 대규모 검사 대신 마스크 100만 장 기부로 방향을 바꿨다.

일본이 두려워하는 ‘의료 붕괴’란 무엇인가. 넘쳐나는 환자를 입원시킬 병실도, 진료할 의사도, 치료할 약도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손 회장의 ‘PCR 해프닝’을 다룬 일본 시사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확진자가 폭증해) 병상이 모자라 환자들이 죽어 나가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의견과 ‘그렇다고 환자 수를 확인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반박으로 엇갈렸다.

일본의 ‘의료 붕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세계가 바라보는 일본은 의료 선진국이다. 5명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영국 레가툼 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건강 국가에 싱가포르, 룩셈부르크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2015년 기준 1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 평균치(4.8)의 3배에 가깝다. 의료 재정 악화와 병상 과잉 공급, 고령화가 맞물려 지난 수년간 축소 기조를 펼치고 있음에도 그렇다.

코로나19에 대한 일본인의 두려움은 수치로 나타나는 현황과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 확진자 수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고, 일본인은 더는 정부를 믿지 않는다. ‘중국 공장이 멈춰 휴지 생산이 중단된다’는 게 가짜 뉴스로 판명됐지만, 여전히 슈퍼의 휴지 판매대는 텅 비어 있다. 마스크와 손 소독제 등 위생용품은 이른 아침부터 약국 앞에서 줄을 서도 손에 넣기가 쉽지 않다.

도쿄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의 경험담이다. 그는 체온이 37.5도를 넘었고 감기 기운도 있어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병원은 “일단 4일째 되는 날 아침에도 체온이 높으면 전화하라”고 답했다. 열이 내리지 않아 다시 전화했더니 그제야 찾아오라고 했다. 의사가 한다는 말이 “코로나19인지 아닌지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우선 인플루엔자 검사를 해 보자” “증세를 보니 ‘아마도’ 코로나19는 아닐 것….”

이 회사원은 지금도 여전히 만원 열차를 타고 수백 명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어쩌면’ 그가 코로나19에 감염됐을 가능성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와 그의 주변인들이 확실한 검사를 받지 못해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특히 도쿄에서는 의료기관들이 사실상 코로나19 검사를 외면하고 있다. 인구 1373만 명에 달하는 거대 도시 도쿄도의 확진자 수는 87명, 누적 검사 건수는 2898건에 불과하다. 검사 건수 대비 확진율은 약 3%다.

7월 도쿄올림픽 개최에 명운을 건 도쿄도와 정부의 미온적인 대책이 불만스러운 것일까.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강도 높은 대응에 나섰다. 도쿄도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인구 94만 명의 와카야마현은 독자적으로 총 1042명을 검사해 15명의 확진자를 가려냈다. 인구 528만 명의 홋카이도현에서는 135명, 755만 명의 아이치현에서는 111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3월 14일 기준) 도쿄도의 확진자 수는 실체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모리 요시로 2020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장은 3월 11일 “지금 단계에서 방향이나 계획을 바꾸는 것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사진은 도쿄올림픽 메인 경기장 인근 올림픽 박물관 앞. 사진 블룸버그
모리 요시로 2020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장은 3월 11일 “지금 단계에서 방향이나 계획을 바꾸는 것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사진은 도쿄올림픽 메인 경기장 인근 올림픽 박물관 앞. 사진 블룸버그

그렇다면 일본은 왜 코로나 검사에 소극적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다. 코로나 검사는 일본 전국 83개소의 보건소와 대학, 민간 검사기관이 담당하고 후생노동성이 총괄한다. 처음에는 후생성 산하 보건소에서만 검사할 수 있었다.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보건소가 거절한 사례도 30건 이상 집계됐다.

비판이 일자 일본 정부는 3월 6일부터 코로나19 검사에 보험을 적용했다. 그럼에도 검사는 늘어나지 않는다. 3월 15일 기준 검사 건수가 누적 1만3000여 건에 불과하다. 보험 적용이 시작된 후에도 하루 1000건이 되지 않는다. 1일 7000건을 검사하겠다는 목표는 멀게만 보인다. 검사 ‘능력’을 제고하겠다고 했을 뿐, 실제 검사 ‘수’를 늘린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게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검사 키트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PCR 검출 시약을 공급하는 로슈 다이아그노스틱스 일본법인은 “일본 국내의 검사 수요에 부응하는 충분한 시약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사카의 섬유 업체 ‘쿠라보우’는 혈액 채취를 통해 15분 만에 코로나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검사 키트를 3월 16일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중국에서 수입 루트를 확보해 하루 1만 개 이상의 공급능력을 갖췄다.

병상도 부족하지 않다. 일본 정부는 전염병 지정 의료기관 등에 총 5000개의 병상을 확보했으며 지역 간 조정을 통해 병상을 추가로 확보해 나갈 방침이다. 시약도, 병상도 충분함이 밝혀졌다. 그리고 바닥이 드러난다. ‘의료 붕괴’를 이유로 내세운 검사의 회피다.

일본의 민간 병원은 코로나 검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병원이나 민간 검사기관에서 검사를 받으려면 정부가 운영하는 귀국자·접촉자 상담센터의 소개가 있어야 한다. 병원에 가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일선 의사는 “센터에 문의하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센터가 지정한 외래 병원은 비공개다. 일본 언론에서는 7, 8곳의 병원을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경험담이 소개됐다.

후생노동성은 이런 절차에 대해 “2009년 신종플루 유행 시 담당 의료기관의 진료가 쇄도해 중증 환자의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바로 “갑자기 확진자가 늘어나면 경증 환자가 병원으로 몰리고 중증 환자는 밀려난다”는 ‘의료 붕괴’의 논리다. ‘검사를 억제한 것은 일본 정부의 영단(비즈니스저널, 3월 11일)’ 같은 친정부 보도가 이 논리의 편을 든다.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온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 중앙병원에서는 3월 11일 확진 환자의 치료 경과를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이 병원은 외과가 중심이고 감염이나 호흡기 전문의는 없다. 논문의 저자는 신경외과의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감염 전문 병원에 중증 환자를 이송하려 했으나, 어떤 병원에서도 “현재 대응이 어렵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외래의의 조언을 참고해 ‘더듬어가며’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 보도 후 다른 병원이 비상근 의사의 파견을 거절했다.”

일본에서는 사망 후 코로나19 양성으로 밝혀진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죽어간 이들은 검사조차 받지 못했다. 일본 전역에서는 ‘실제 감염자는 수십 배가 넘을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돈다. 실체를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이 가짜 뉴스에도 휴지를 사러 가게 만든다. 정말로 붕괴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 머쓱해진 손 회장은 언제 재평가를 받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