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대한항공 서울발 밀란행. 나의 첫 비즈니스 여행이었다. 베니스의 리도 섬에서 했던 첫 CF 촬영 때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 난 남아공, 모잠비크, 프라하, 노르망디, 홋카이도 등 세계 곳곳을 ‘CF 감독’이라는 신분으로 영상 제작 기술을 몸으로 느끼며 10여 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한국은 영상 제작 수준이 날로 높아져 아시아에서 ‘한류’라는 문화 트렌드를 만들어 내고, 드라마, 영화, 리메이크 판권 수출을 이루어 내는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문화강국으로 부상하였다.

 평생 CF 제작에 몰두한 내 일상은 전 세계 국가들의 출입국 도장으로 빼곡한 내 여권이 대신 말해 준다. 그러나 요즘은 부쩍 전 세계가 아닌 일본 출입국 기록이 늘어나고 있다. CF 감독에서 한국 영상콘텐츠를 수출하는 ‘콘텐츠 제작자’로 변신한 뒤 내 여권의 여행 기록들도 달라진 것이다. 항공카드에 쌓인 100만마일의 마일리지는 아시아 최고의 시장을 향한 대한민국 콘텐츠 제작자의 거대한 포부와 땀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결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너무 일찍 꿔 버린 백일몽이었을까. 일본 관계자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현재의 한류가 ‘한철 메뚜기’처럼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우려를 내비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저 우리를 시샘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얼마 전 만났던 <니혼TV>의 타무라씨는 한국 영상콘텐츠가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우선 세계 표준을 준수해 사전 기획하는 제작 단계가 반드시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한국 드라마의 경우 감각적인 영상과 배우들은 좋지만, 해외 수출을 고려하지 않고 제작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방송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드라마 내용 중 카페에서 남녀가 대화하는 장면에 깔리는 카페 배경음악의 저작권이 일본에서는 해결되지 않아, 드라마 장면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

 첫 술에 배부른 사람이 누가 있으랴만, 이제 막 부흥하기 시작한 한류의 바람이 예전 1980~90년대의 홍콩 영화 신드롬처럼 끝나 버리지 않도록 타산지석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시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류 콘텐츠를 수출하는 나의 시각에서도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실제 해외에 한국의 프로그램을 판매하고 그 프로그램이 방영되기까지 과정에서 한국 배우들이 현지 프로모션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현지 마케터들이 아무리 애를 써 봐도 60~70%의 효과를 이루어 내기 힘든 상황인데 반해 주연배우가 한번 현지를 방문하면 100% 이상의 효과가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이제는 우리나라 배우들도 세계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류의 지속과 성장에 좀더 책임감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드라마 계약시부터 이를 충분히 고려해 그 과정도 절차상 공식성을 갖추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도 ‘한류’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르지만, 국내 콘텐츠를 사랑하는 관객이 있고 든든한 제작자와 수많은 작품이 있는 한 나의 바람은 헛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는다. 내 카드에 조금씩 쌓여 가는 항공 마일리지만큼 한국 문화의 파워도 차곡차곡 쌓여 훨씬 강해질 것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새벽을 가르며 101만마일째 비행을 위해 공항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