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오접(誤接)된 전화가 걸려오듯 불현듯 찾아든다. 지난 가을 하늘은 깊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삶을 정리하고 떠나는 것들이 치르는 이별의 예식들은 장려하다. 칠장사 초입과 미리내 들어가는 길, 그리고 금광초등학교 정문 앞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에서 황금 비늘들이 삐라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나는 그 나무들 아래서 왜 내가 나무가 아닌 발 달린 짐승인가를 곰곰 생각해 본다. 38번 국도에서 시립도서관 앞을 거쳐 집으로 돌아올 때 보니 길가 느티나무 잎에도 단풍이 곱다. 나는 발 달린 짐승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가슴이 시리다.

 산책길에 새까맣게 떨어져 있던 매미들이나 날지 못하는 잠자리들의 모습도 이제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울지 않는 주검과 날지 못하는 젖은 날개로 여름의 종말을 유포한다. 찬 물길에 살던 도롱뇽과 가재들도 땅속 깊이 숨는다. 들판의 웅덩이들엔 물이 마르고, 무당벌레들은 막무가내로 실내로 날아든다. 집의 개들은 늦가을 무렵부터 부쩍 사료를 많이 먹는다. 저들의 조상은 한때 야생이었으니, 겨울을 나기 위해 야생의 습성으로 준비하는 게다. 나는 옷장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밴 긴 내복을 꺼내 입는다. 햇빛은 탈색된 듯 희미해지고, 마른 풀들은 바람결에 서걱거린다. 호수 너머 오존이 줄어든 대기에 부~우연 빛을 뿌리며 떠 있는 태양은 방치된 고아 같다.  낮에 빨아 널은 속옷과 양말들이 잘 마르지 않아 저녁이 되어도 축축하다.  그런 날이면 내 삶의 덜 마른 기억들도 축축해진다.

 멀리까지 나가던 산책 거리가 점점 짧아진다. 늘 다니던 푸른 들판의 오솔길이 부쩍 몸을 사리며 낯설어진다. 물가 버드나무 가지에서 잎이 진 지 이미 오래다. 기원(起源)을 알 수 없는 밤들은 더 빨리 찾아온다. 깜깜한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일 때 하천 쪽을 돌아다니던 너구리가 담대하게 올라와 집안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동지(冬至)지나자 목질(木質)의 밤은 길어지고 긴 밤들에 꿈은 번잡해진다.

 새벽에 깨어나 마른 풀들에 무서리 하얗게 내린 풍경을 들여다보면 흰 공작이 날개 펴고 앉은 듯하다. 불길의 굽이침에 휘어지곤 하던 나이를 지나니, 황혼은 누이동생과 같이 다정해지고, 쏟아져 들어오는 저녁의 기울어진 길들에 가슴은 자주 다친다.

 12월이면 한해를 영예롭게 살아내지 못해 핏속으로 나쁜 운명이 스민 듯 공연히 바쁘고 초조해진다.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가시가 되어 몸을 찌르고, 격렬하고 두려웠던 꿈들은 그 자취가 희미해진다. 12월이면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줍다가 문득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 하고 염려한다. 12월이면 객지에서 떠돌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끝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근심은 깊어진다. 12월이면 전염병처럼 쓸쓸함이 번식해서 바짓자락에 저녁 찬이슬을 자주 묻힌다. 12월이면 촛대, 등잔, 이불, 구운 빵, 접시, 커튼 같은 것들이 좋아진다. 12월이면 내 뼈는 더욱 강건해지고 사춘기 때처럼 몽정(夢精)을 시작한다.

 두브, 당신의 이름을 가만히 입술에 얹어 본다. 두브, 나를 바라보라. 두브, 나는 여위었다. 두브, 너무 오래 나와 떨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섬광처럼 별들의 은밀한 파열을 안고 있는 내 안으로 들어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