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시 교과서 ‘도요타시’

 11월초 2박3일간 일본 나고야를 다녀왔습니다. 도요타자동차를 취재하기 위해서였죠. 도요타 본사는 나고야에서도 차로 1시간 가까이 떨어져 있더군요. 오후 12시30분께 도착한 도요타 시내는 썰렁한 느낌이었죠. 알고 보니 사람들이 대부분 도요타의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그 시간이 근무시간이라서 그렇다는군요. 도로엔 자동차부품을 실은 트럭들만 분주하게 오갔지요. 한 관계자는 “도요타 본사를 축으로 반경 한 시간 거리에 2000여개 부품업체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더군요. 세계 최고의 기업도시라는 닉네임이 빈 말은 아닌 듯했습니다. 아예 도시 이름도 고로모 시에서 1959년 도요타 시로 바꿨으니까요.

 그 순간 지난 7월 우리 정부가 선정한 기업도시가 눈앞에 떠오르더군요. 원주와 충주, 무안, 무주 등 4개 지역이지요. 아무래도 관련법 하나 없이 기업과 지자체가 자발적으로 만든 도요타 시가 부럽기만 했어요. 우리 기업도시는 지역별 나눠 먹기식으로 지정됐다는 걸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물론 지역 균형발전 추진이라는 정부의 선정 이유도 수긍이 가긴합니다. 그러나 굴지의 대기업들이 일찌감치 기업도시에서 발을 뺀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죠.

 도요타 시의 40만명 인구 가운데 30만명이 도요타사의 밥을 먹고 산다고 말을 하더군요. 일본 전국 677개 기초 지자체 중 도요타 시의 재정자립도가 1위인 이유가 여기에 있죠. 도요타가 내는 세금이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 도요타는 인력을 뽑을 때도 도요타 시 출신을 우대한다는군요. 도요타 역 부근 백화점 건물에 들어선 도서관 역시 도요타가 후원을 한답니다. 2005년 아이치 세계박람회를 유치한 원동력도 도요타 지원이 뒷받침됐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한국의 기업도시가 ‘무늬만 기업도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도요타 시 모델을 훌륭한 교과서로 삼아야겠지요.

 서울로 돌아와 파주 출판단지를 취재했는데, 이곳이 진짜 한국의 기업도시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출판·인쇄·유통 등  출판관련 업체만 105개사가 몰려 있기 때문이죠. 파주 북시티 산파역인 이기웅 열화당 대표의 말엔 ‘뼈’가 담겨 있었습니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 한 곳 유치한다고 해서 무슨 기업도시가 되겠습니까.”



 김치냉장고와 현정은 회장

 김치냉장고의 등장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온도 조절만 잘하면 1년은 물론 2년 이상 숙성시켜 먹을 수 있는 김치냉장고가 각 가정에 빠르게 보급되면서 김장철 배추 수요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유통 관계자들이 입을 모으더군요. 전에 열 포기를 담가 먹었으면, 이듬해에는 여덟 포기만 담근다는 거죠.

 김치냉장고의 등장이 김장용 배추 수요에 영향을 끼치듯, 세상일은 늘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대 변수인 북한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국제사회 역학구조 변화는 물론, 북한의 상황 변화 등이 한반도 남쪽에 사는 이들의 삶을 요동치게 합니다.

 11월10일과 11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개성에서 북한 측과 접촉을 가진 끝에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파국을 우려했던 사람들이 모두 한숨을 돌린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김윤규 부회장의 경질로 문제가 발생한 시점부터 현 회장의 방북을 통한 사업 재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앞으로도 이 같은 일은 지겹게 반복될 것이란 불길함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나마 현 회장이 실익을 꼼꼼히 챙기는 협상으로 북한 측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북한 측에서 보면, 고 정주영 회장과 고 정몽헌 회장에 이어 김 부회장으로 이어지던 ‘편한 협상 상대’가

 현 회장이 대북사업을 직접 챙기기 시작하면서 ‘깐깐한 협상 상대’로 변했다는 점이 불편했을 겁니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단순히 기업의 손익만을 따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란 건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그렇지만 수익 발생 없는 투자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그룹을 침몰 직전까지 몰고 갔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현대 위기를 보면서 배웠습니다.

 현 회장이라는 김치냉장고의 등장이 남북경협이라는 김장시장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김치냉장고의 등장을 외면한다고 해서 김장시장에 득 될 건 없겠죠. 배추를 사서 인민을 먹여야 하는 북측이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금융사들은 자신들이 보수적이라고 강조합니다. 고객의 재산을 맡아 잘 관리하고 수익을 안겨 주기 위해서는 위험보다는 안정을 택하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금융사들 중에서도 보험업계는 가장 보수적인 측면에 속하는 업종 중 하나입니다. 고객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보험사들은 이런 ‘보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해 자동변속기 요율을 적용해 보험료를 내렸던 모 손보사의 경우, 보험료를 내렸음에도 계약자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보험요율 체계 특성상 자동변속기 차량의 요율을 내리면, 수동변속기 차량의 요율을 상대적으로 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미처 수동차량의 요율은 올리지 못하고 자동변속 차량의 보험료만 내렸고,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침묵했던 것입니다. 계약자에게 제공해야 할 중요한 정보를 회사의 안위를 위해 감춘 셈입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법규위반 할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비자들에게 제도 도입의 당위성을 알리고 합의점을 찾는 것이 우선이지만, 보험사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려다 반발만 키운 꼴이 됐습니다.

이는 비단 손보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생보사 역시 그동안 암보험 특약 축소, 자동이체 보험료 할인 폐지 등 계약자의 이익에 반하는 약관 수정에 대해 공시하거나 알린 회사는 한 곳도 없었습니다. 물론 보험사들이 경영환경 악화, 비용 문제로 소비자의 이익을 줄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수긍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바뀌는 부분이 있다면, 그에 대해 소비자에게 올바로 알리는 것이 기업의 의무입니다. 부정적이던 보험 이미지는 그동안 업계와 전문 설계사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업계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감추기만 하면, 그나마 쌓아 왔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보수적’이란 말이 회사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험업계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시장질서 흐리는 벤처캐피탈

 “그게 어디 투자한 겁니까. 원금에다 이자 얹어서, 수수료까지 챙겨 갔는데….”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받았다가 3년을 시달린 한 벤처기업 사장의 얘깁니다. 지난 11월에야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그는, 이제는 시원하다(?)고 합니다.

 더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벤처투자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하고, 원금을 먼저 회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투자를 받은 벤처기업인들이 죽을 지경일 겁니다.

 하지만 벤처기업인들은 벤처캐피탈의 횡포에 대해 너무 적나라하게 기사화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자금이 궁색한데 그마저도 끊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서로 상생해야 하는 관계에서 싸움을 붙이지 말라는 경고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대놓고 비난을 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일단 기업을 계속 경영하려면 언젠가 또 돈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 찍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벤처기업인들은 비난의 화살을 정부로 돌렸습니다. 벤처 부활을 외치는 정부의 지원이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겁니다. 보통 자금이 필요한 벤처기업들은 금융권으로부터 외면 받습니다.

 담보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림없습니다.

 벤처캐피탈은 제도적 허점을 노리고 원금을 보장받길 원합니다. 실정법은 교묘히 빠져나갑니다.

 이렇게 편법을 동원하는 벤처캐피탈에 대한 관리감독에 대해 중소기업청, 금감원, 산자부 등 소관부처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깁니다.

 한 중소기업청 담당자는 금감원 등에서 이뤄지는 관리감독 실태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금감원이 담당할 건 거기서 알아서 하고, 우리가 할 건 우리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이러는 사이 벤처기업인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은행장과 포커페이스

 카드놀이에선 얼마나 좋은 패를 들고 있느냐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커페이스’ (Poker face)입니다. 좋은 패를 들고 있어도 이를 상대에게 읽힌다면, 결과에서 큰 차이가 날 수 있으니까요. 상대방이 패를 읽고 금세 게임을 포기할 경우, 자신이 들고 있는 패가 아무리 좋아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기란 힘들지요.

 이는 경영협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M&A(인수합병)처럼 상대방과의 신경전이 치열한 협상에서는 ‘포커페이스’가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런데 최근 시중 은행장들을 보면 ‘참, 게임을 못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이 눈앞에 다가오자, 시중 은행장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인수 선언’을 내뱉고 있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은행장은 김종렬 하나은행장입니다. 그동안 간접적으로 인수의지를 밝힌 김 행장은 지난 11월9일 “컨소시엄을 통해 외환은행을 인수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에 앞서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도 인수 의지를 내비쳤죠. 또 국민은행 등 일부 시중 은행장도 직·간접적으로 외환은행 인수 가능성을 시사한 상태입니다.

 은행간 생존경쟁이 치열한 만큼 M&A를 통한 대형화는 분명 중요합니다. 인수능력이나 조건, 시너지 등을 면밀히 살핀 결과, 외환은행 인수가 타당성이 있다면 당연히 M&A에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죠.

 하지만 아쉬운 점은 외환은행 매각이 국부유출이라는 비난을 받는 와중에서도 시중 은행장들이 나서서 외환은행 몸값을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수 희망자가 많으면 당연히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죠. 인수 희망자들이 이처럼 몸 달아 있으니, 불법 탈세행위 등으로 사지에 몰린 론스타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금융권의 한 원로는 이를 보고 “조금만 느긋해도 협상에 유리할 수 있을 텐데… 사람들 표정 관리 좀 하지”라며 쓴 입맛을 다셨습니다.

 최근 황영기 우리은행장은 돌연 ‘인수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행장의 의중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지금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