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마당에 가을꽃이 가득하다. 해마다 씨 뿌려 키우는 백일홍이 한창이고, 개미취와 패랭이가 피었다가 졌다를 반복하고, 작년에 화분으로 사들인 것들을 파묻어 놓았더니 어느덧 무심히 자란 국화가 활짝 망울을 열기 시작했고, 이태리봉선화와 활연화도 아직껏 환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취꽃이다. 처가에서 두어 그루 얻어다가 옮겨 심은 지가 수삼 년 되었는데, 어느새 여기저기로 번져 마당을 빙 둘러치고 있다. 이른 여름부터 끊임없이 나의 밥상에 오르기 위해 제 잎을 다 바쳤음에도 모진 생명력으로 키를 키워오더니, 이른 가을부터 흰 꽃을 활짝 피우기 시작한 취꽃이다. 흔히 ‘취나물’이라고 불려 키가 작은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다 자라고 보면 1미터는 기본이고 1미터50센티가 넘는 것도 많다. 곰이 먹는다는 곰취는 노란 꽃이 피지만, 흔히 우리 밥상에 오르는 참취는 흰 꽃이 핀다. 우리 집 마당을 둘러치고 있는 건 참취이다. 샛노란 수술을 중심으로 작은 흰 꽃이 무리지어 피는데 멀리서 보면 안개꽃처럼 잔잔하고 애틋하다. 자고로 해소, 이뇨, 방광염 등에 약재로 쓰여 왔을 뿐 아니라, 그 잎은 오랫동안 밥상 위에 나물로 올라와 우리에게 친숙한 꽃이 바로 취다.

 꽃이 아름다운 건 낮보다 밤이다. 으스름달밤에 나가 마당 가운데 앉아 있으면 사방에서 키 큰 취꽃이 바람에 가만가만 흔들리며 손이라도 흔들어 주는 듯한데, 삽상하고 고요하고 환한 것이, 어느덧 보는 이의 마음을 순하게 가라앉힌다. 키가 크니 바람에 약해서 바람이 불지 않는 듯한 날에도 취꽃은 저 혼자 가만가만 흔들린다. 화려하진 않지만 순백색 꽃이 언제 보아도 고즈넉하다. 서리가 내릴 때까지 필 터이니, 개화기도 비교적 긴 꽃이다. 우리 민족은 원래 못 먹는 풀이 없다. 상추는 늘 밥상에 오르지만 상추꽃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잎을 따 먹다가 놔두면 상추도 거의 1미터 가깝게 자라 마침내 담황색 꽃이 피고 아욱 역시 백색의 꽃이 피는데 그 꽃은 수수하고 정답기 이를 데 없다. 나팔 모양의 꽃이 낮에만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메꽃도 잎은 나물로 먹고 뿌리는 약용으로 쓰며, 노박덩굴은 낙엽 지는 덩굴식물로 잎은 나물로 무쳐먹고 과실은 제수로 올릴 뿐 아니라, 하다못해 고들빼기나 민들레도 나물로 먹고 김치를 담가서도 먹는다.

 개수대에 보니 웬 시든 풀이 놓여 있다. 마당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이제 쇨 대로 쇠어 한생을 마감하던 민들레 잎을 아내가 채취해 놓은 것이다. 한 줌밖에 안 되는 것이지만, 민들레는 무엇보다 위장에 좋다고 하니 걸핏하면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내게 먹일 요량이다. “그거, 질겨서 어떻게 먹어?”  “삶아서 무치면 돼요.” 대답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어쩐지 신명이 담겨 있다. 나는 슬그머니 집 뒤의 공터로 나가 아내의 말을 좇아 민들레를 뜯는다.  공터엔 어디든 민들레가 자생해서 자라난다. 삶아서 된장으로 무친 민들레 나물이 있어 이 가을 어느 저녁밥상이 유난히 삽상하다.

 사는 행복이 어디 꼭 큰 성공에서만 오겠는가. 민들레나물 하나로 풍성해진 식탁에 앉아 마당을 건너다보니 취꽃이 여전히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다.  아직 산은 푸르지만 가을은 나날이 깊다. 설악산 꼭대기엔 이미 황홀한 가을단풍이 한창이라고 한다. 지난 연휴엔 수많은 단풍놀이 차량 때문에 고속도로가 큰 체증을 빚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단풍놀이도 나쁠 거야 없겠지만, 가을을 느끼고 품기 위해 굳이 기름값을 쏟아 부으면서 설악산, 지리산까지 고생고생 쫓아갈 필요는 없다. 욕망을 따라 나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가 있는 시선을 안으로 들이는 것이 가을이다. 취꽃 한 그루, 민들레 시든 잎 몇몇으로 이미 나의 가을은 나의 영혼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오늘밤은 멀리 있는 친구, 하다못해 오래 돌아보지 못한 나 자신에게, 큰마음 먹고 긴 편지 한 통 써야겠다. 가을을 느끼니 내 영혼의 내부에 말(言語)들이 많이 쌓여 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