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의탁하는 것이다. 맡기고 기대어 빚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옛글에 ‘구름에 해가 비치면 노을이 되고, 시내가 바위에 걸리면 폭포가 된다. 의탁한 바가 다르고 보니 이름 또한 여기에 따르게 된다’고 했고, ‘뜰 가운데의 꽃은 나비를 빼어나게 하고, 벌을 우아하게 만들며, 이슬을 요염하게 하고, 달을 따스하게 해준다’고 했다.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동의와 도움을 얻는 일이다. 우리는 부모와 스승과 동료에게 기댄다. 기댐으로써 나의 빛깔을 얻는다. 돌담의 윗돌이 아랫돌에 기대어 돌담을 완성하듯이. 인생은 서로 그렇게 주고받는 일 외에 다른 큰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신세 진 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해 오셨다. 들판에서 추수를 하던 일이 가끔 생각난다. 벼를 다 베어내고 그것을 일일이 단으로 묶고 며칠을 가을볕에 말리고 습한 물기가 다 증발한 후에 탈곡이 시작되었다. 햇빛과 장마와 흙과 바람과 가족들의 노동이 한 해 동안 키워 온 열매는 그리하여 수확되었다. 수확은 과정에 바쳐진다. 열매는 어느 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탈곡은 온전한 열매를 얻는 마지막의 일이지만, 열매를 얻으면서 과정을 기억할 때 보람과 기쁨도 함께 얻게 된다. 논밭이 제 몸을 비우면서 우리 인간에게 가르치는 것은 간소하지만 이런 깊은 뜻이 있다.

텃밭이 여러 곳 있어 요즘 석양에는 배추와 무를 거두어가고 깻단을 털어 작은 깨를 거두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웃는 행복한 얼굴이다. 역시 그들이 거두어가는 열매에도 햇빛과 장마와 흙과 바람과 노동이 담겨져 있다. 그들의 얼굴이 환히 웃는 행복한 얼굴이라는 것은 열매를 수확해가기까지 의탁한 것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도 역시 기댄다. 고양시 행신동 아파트로 이사를 온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거의 매일 나는 노부부를 만난다. 할머니는 중풍(中風)을 앓은 뒤여서 걸음이 영 불편하다. 부부는 땡볕의 여름날에도 눈보라의 겨울날에도 함께 걷는다. 그들이 걷는 사이에 매화와 배꽃과 모란과 해당화와 국화가 피고 진다. 할머니는 오른쪽 다리를 끌며 걷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꼭 쥐고 걷는다. 걸음걸이가 아주 느려서 부부가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모습을 지켜보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덧 부부는 우리 동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나는 요즘 ‘동사(同事)’라는 아름다운 말을 발견하게 되었다. 동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도 동사의 소득이요, 부부가 아름답게 늙어 가는 것도 동사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공업중생(共業衆生)’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뜻은 매한가지다. 요즘 세상에는 독불장군들이 많아서 이런 충고를 해도 귀담아 듣지 않겠지만, 우리가 인생이라는 도서관에서 꼭 읽어야 할 것은 이 동사의 아름다움이다. 거들면서 빚지면서 함께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