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곤 취재팀장

allen@chosun.com

레프리(Referee)와 정부(Government)

스포츠 경기에 밤잠을 설쳐가며 열광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은 가장 재미없는 월드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축구시합의 주체가 선수인지, 아니면 주심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월드컵이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주심이 꺼내든 경고카드는 307장이었다고 합니다. 퇴장카드도 28장에 달했습니다. FIFA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고, 심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은 굳이 나무랄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강화된 권한을 마치 권력인 양 행사하는 심판은, 축구경기의 재미를 반감시켰습니다. 각종 운동경기에서 심판을 일컫는 레프리(Referee)는 법률용어에서는 중재인, 조정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휘두르는 권력이 아니라 양보와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축구 경기장을 시장으로, 심판을 정부로, 선수를 경제주체로 대입시켜보면 어찌 그리도 맞아떨어집니까. 심판이 적용한 엄격한 규칙은 정부의 규제와 다름없습니다. 심판의 권한은 정부의 권력이 될 것입니다. 규제와 권력이 판을 친다면 그라운드에서 뛰어다녀야 할 선수들이 제대로 플레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축구경기에서 심판은 ‘화면에 자주 비치지 않아야 훌륭하다’고 했던가요.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무리 없이 경기를 이끌어가는 심판이 역시 명심판인 모양입니다.

박인상 기자

edream@chosun.com

슈퍼개미식 투자법

최근 여의도 큰손으로 부상한 ‘슈퍼개미’ 몇 분을 만나봤습니다. 과연 예상대로 적게는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까지 만지는 큰손들이더군요.

그들이 오너 전횡을 막는 ‘파수꾼’인지, 주식시장 ‘교란꾼’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을 잠시 접어두면 역시 ‘돈을 벌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굴리는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투자 방법이 일반 개미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개인 투자자로 현대약품 최대주주인 박성득씨는 “종목이 아닌 ‘시간’을 산다”고 말합니다. 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주식을 발굴, 강태공처럼 ‘때’를 기다린다는 얘기겠지요. 실제 그는 장이 열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모니터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자가 만난 슈퍼개미들은 종목 전문가들이었습니다. 회사 역사부터 매출 포트폴리오, 수익성 지표는 물론 경쟁사 현황까지 꿰뚫어보고 있더군요. 대동공업 2대주주인 박영옥씨는  “1주일에 3-4번씩 투자한 회사를 돌아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습니다. 일반인들이 소위 ‘정보’를 보고 ‘감(感)’으로 투자하는 반면, 그들은 ‘가치’를 보고 ‘눈’으로 투자하는 격입니다.

일부 투기꾼이 끼어있는 건 틀림없지만 대부분 슈퍼개미들은 장기 투자자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박영옥씨는 “아들 돌 때 받은 축의금 750만원을 대동공업에 투자해 보유 중”이라고 했고 박성득씨는 “특정 종목이 물가 대비 매년 10% 수익률을 안겨준다면 평생 보유하겠다”고 밝히더군요. 주식 투자가 ‘타이밍의 예술’인 이상 치고 빠지는 단타보다는 ‘인고의 미학’을 깨달은 느긋한 투자자가 이기는 게임 아니겠습니까.

오성택 기자

ost69@chosun.com

이번엔 ‘이자폭탄’?

한국은행이 집계한 가계대출 누적액수가 6월 말 기준으로 322조원이라고 합니다. 그중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금액이 200조원가량이고요. 문제는 주택담보대출의 대부분이 변동금리 대출이라서 콜금리, CD금리가 인상되면 덩달아 이자가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연간 1%만 올라도 2조원의 이자가 가계에서 추가로 나와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앞으로 더 오를 거 같습니다. 그런데, 금리 인상에 따른 대출 이자가 콜금리 인상 한 달 만에 이뤄지더군요. 시중은행 대부분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콜금리 인상폭보다 높게 조정하는 민첩함을 보였습니다. 예금이야 고정금리 상품이 대부분이다 보니 금리 인상의 혜택을 보는 예금자들은 거의 없는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금리 인상의 과실은 은행이 따고, 가계는 주름살이 늘게 생겼습니다.

뒤늦게 내가 “변동금리대출이 대부분인 담보대출을 고정금리대출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독당국과 시중은행이 조금만 신경써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자폭탄’운운하는 걱정이 단순한 ‘기우’로 그치길 바랍니다.

장시형 기자

zang@chosun.com

중견 기업이 망하는 이유

요즘 중견 IT업체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IT 강국으로 만들었던 그런 기업들입니다. 그 중에 레인콤도 끼어 있습니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죠.

벤처신화로 불렸던 레인콤은 요즘 적자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가 봅니다. MP3플레이어 하나만으로 거친 세상을 헤쳐 왔는데, 이제는 이게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팔아도 손해 볼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레인콤이 이렇게 된 건 빠른 변화에 신속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레인콤도 작았을 땐 빨리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중견 기업으로 성장한 이후 변화에 민첩하게 대처하기엔 ‘몸’이 무거워졌습니다. 중소기업 시절 시장이 전쟁터로 변하기 전 털고 일어서던 습성은 둔해졌습니다. 소비자의 요구가 변해도 알아채지 못하고, 시장의 트렌드가 바뀌어도 1위 자리에 안주한 탓에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힘이 세진 것도 아닙니다. 몸이 커졌지만 대기업에 맞서 싸우기엔 힘이 달리는 게 사실입니다. 대량생산을 통해 단가를 낮추는 ‘규모의 경제’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마케팅과 R&D에 무작정 투자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인콤 뿐만 아니라 다른 IT기업들도 마찬가집니다.

IT업계에도 전방 초소의 경계병처럼 ‘졸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만큼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한순간 잠깐 조는 사이 경쟁자는 멀리 도망가고, 뒤쳐져 있던 적은 목전에 다가와 있는 게 현실입니다.

임상연 기자

sylim@chosun.com

부동산에 얽매인

생보사 상장

최근 보험시장에서는 생명보험사(생보사) 상장이 또 다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17년 만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보사 상장 방안이 나왔기 때문이죠. 그러나 논란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듯합니다. 생보사 상장 방안을 놓고 생보업계와 시민단체, 보험 계약자 등 이해 당사자들은 여전히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죠.

논란의 핵심은 생보업계가 보유한 50조원(시가기준) 가량의 부동산에 있습니다. 부동산은 여타 자산과는 달리 회계상 장부가로 처리됩니다. 과거 10억원에 산 건물이 현재 가치(시가)가 100억원이라도 장부상에는 10억원으로만 기재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 보유 부동산을 ‘어떻게 현재 가치로 평가해, 평가이익을 얼마나 보험 계약자에게 나눠줘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생보업체들은 보유 부동산을 평가할 법적인 근거가(자산재평가제도) 폐지됐고, 보험 계약자의 몫을 구분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평가차익을 배분하기 힘들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선 상장 방안에서도 명확한 해법을 내리지 못한 상태죠.

생보업계의 주장은 법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일면 타당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생보사의 보유 부동산에 보험 계약자들의 몫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하지 않을까요. 계약서가 사라졌다고, 또는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하다고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홍표 기자

hawlling@chosun.com

이헌재와 러플린

로버트 러플린 전 KAIST 총장은 한국을 떠나며 “한국인은 영웅이 와서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바라지만 세상에 영웅은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우리는 이 갑갑한 현실을 ‘구원’해줄 영웅을 원했습니다. 그때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영웅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경제난국을 ‘게임’하듯 평정하고 사라졌습니다.

몇 년 뒤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자 영웅이 다시 돌아옵니다. 한 기자가 표현했듯이 “호주머니에 손을 꽂고 특유의 느릿한 걸음”으로 카리스마 넘치게 돌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웅과 그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얘깁니다.

2006년 7월 현재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검찰의 조사를 받는 신분이 되어 있습니다. 출국이 금지되고 계좌 추적을 당하는 ‘조사 대상자’입니다. 영웅은 그저 능력 있는 ‘관료’였을 뿐 입니다. 가끔은 자기 밥그릇을 챙길 줄 아는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입니다.

러플린 총장은 덧붙였습니다. “한국인들은 해결 방법을 이미 알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원합니다. 영웅은 바로 여러분이 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