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갈수록 초록이 좋아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이 애틋해진다. 아직 세월의 소회를 말하기에는 부끄럽고 겸연쩍은 나이지만 영원불멸하는 자연의 섭리 앞에 점차 숙연해지는 것은 시간만이 가르쳐 주는 위대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여름이다. 태양의 신 염제(炎帝)가 위용을 떨치는 계절, 뜨겁고 혹독하며 가열찬 계절이다. 옛사람들이 여름에 붙인 별칭이 재미있다. 하루하루가 깐깐하고 지루하게 이어져 깐깐 오월, 미끄러지듯 한 달이 가서 미끈 유월, 어정어정하는 사이에 한 달이 지나 어정 칠월. 그러니까 여름은 조심조심, 사뿐사뿐 흘려보내 마땅한 때라는 것이다. 방학이며 휴가가 집중되어 있어 모두들 도시를 탈출하여 산으로 바다로 내달리기에 바쁘지만, 한편으로 여름은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아끼고 돌보며 곧 다가올 결실의 계절 가을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그래서일까, 볕 좋고 날 좋은 봄이나 명실상부 ‘독서의 계절’로 불리는 가을보다는 오히려 여름에 책이 더 많이 팔리고 서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진다고 한다. 들썩들썩한 생명의 아우성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가 도리어 민망한 봄은 출판계의 최대 비수기로 꼽힌다. 겨우내 차갑고 외로운 골방에서 홀로 고독과 맞대면하며 창작에 매진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봄볕처럼 지펴 오르지 못한 채 시간에 파묻히고 마는 풍경은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했다.

 이제 문학의 위기, 기초 예술의 고사 등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새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너무 바빠 한가하게 책을 펼칠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아니, 너무나도 자극적인 영상 매체와 게임이며 인터넷, 오락물들이 범람하는 세상에 지루한 독서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기조차 한다. 기껏해야 성공을 위한 실용서적들, 말초적인 감각을 만족시키는 가벼운 번역물들이 소비될 뿐이다.

 하지만 나는 고루하고 진부하게도 여전히 이러한 세태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다. 도리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날로 바뀌는 뉴스와 선정적인 화제들에 지칠 때면 컴퓨터를 끄고 조용히 책을 펴든다. 이 여름 내게는 도서관만큼 훌륭한 피서지가 없다. 그 곳에는 나를 그 어떤 유행보다 뜨겁게 끌어안는 재미가 있다. 두툼한 부피에 글자가 빽빽이 박힌 대하소설 속의 굽이굽이 흘러넘치는 이야기들은 실로 대하 위의 가랑잎 하나에 지나지 않는 부박한 인생을 인정하고 이해하도록 한다. 나를 긍정하게 하고, 또한 나 자신을 연민으로 바라보게 한다. “시집을 주르륵 한 번에 읽어 독파하려 하지 말라”는 노시인의 말을 되새기며 도서관에서 읽는 시의 맛은 홍어회처럼 알싸하고도 유별나다. 육신을 혼곤하게 하는 더위를 피해 여행이며 음식, 색다른 여가에 골몰하기보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책을 펼친다. 대저 열을 열로써 다스린다는 말의 밑바닥에는 ‘힘에는 힘, 강한 것에는 강한 것’으로 상대한다는 치열한 도전의 정신이 깔려 있지 않은가.

 바다도 좋다. 산도 좋다. 그 넉넉한 푸름에 물들어 고단한 육신과 황폐한 영혼을 위로받을 수 있다면 어디든 누구와 함께든 다 좋다. 하지만 주차장이 되어 버린 고속도로, 쓰레기가 넘치는 계곡과 해수욕장, 취객들의 고성방가와 유흥으로 얼룩진 피서가 여름을 누리는 전부일 수는 없다. 하늘이 끓고 땅이 더워지는 섭리가 오로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한 것만은 아닐 터. 햇볕이 뜨거운 만큼 가을의 과실은 달고, 더위를 잘 견딘 숨탄 것들은 다가올 추위를 이겨낼 힘을 얻는다. 양서와 함께 몸과 마음을 보듬는 서늘하고도 치열한 여름을 기대한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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