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훈 가젯서울 미디어 대표 한국외국어대, 전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장지훈 가젯서울 미디어 대표
한국외국어대, 전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2000년대에는 PC,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에 의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찾아온 것처럼, 최근 찾아온 슈퍼사이클의 배경에도 데이터센터라는 키워드가 자리한다. 각 시대를 대변하는 키워드의 변화에 따라 반도체 시장의 핵심 부품의 모습도 함께 변화해왔다. 이는 CPU, GPU 등으로 대변되는 로직반도체(논리적인 연산을 수행하는 반도체) 시장도 마찬가지다.

PC가 반도체 시장 성장을 이끌던 2000년대, 로직반도체 시장의 핵심 부품은 CPU와 게임용 GPU였다. 이 중 CPU의 경우는 이미 시장에 확고한 승자가 정해져 있었다. 압도적 강자 인텔과 경쟁자 AMD의 2강 체제로 만들어진 CPU 시장 정세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반면 GPU 시장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진행 중이었다. 부두 시리즈의 3DFX, 버지의 S3 그리고 매트록스와 같은 기업들이 경쟁했고, 결국 엔비디아와 ATI가 살아남았다. 이후 ATI는 AMD에 인수되는데, 그렇게 GPU 시장 역시 CPU 시장처럼 2강 체제로 정립되었다.

이어진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이 등장하며 이들이 주인공의 자리에서 잠시 멀어지는 듯했다. PC에서 스마트폰으로 시대가 바뀌며 발생한 로직반도체의 패러다임 전환이 그 이유였다. 핵심 부품들이 따로 조립돼 완성되는 PC와 다르게 스마트폰에서는 여러 개의 반도체가 하나의 칩 안에 담긴 SOC 구조를 취한다. 이것을 모바일 AP라 하는데, 이 모바일 AP 시장 경쟁에서는 CPU, GPU와 같이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들이 강했던 분야를 넘어서는 다양한 역량이 요구되었다. 모바일 AP에서는 특히 통신 역량이 중요했다. 당시 그래픽카드만을 만들던 엔비디아는 물론이고 AMD나 인텔을 비롯한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 대부분이 이 통신 역량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들은 크게 고전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들은 모두 모바일 AP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시장의 헤게모니는 전통의 통신 기업 퀄컴이 쥐게 되었다.


로직반도체 시장의 경쟁이 치열하다.
로직반도체 시장의 경쟁이 치열하다.

로직반도체 시장 패권은 여전히 PC에

여기까지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스마트폰 시대의 로직반도체 시장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다. 비록 기성 로직반도체 진영은 모두 모바일 AP 시장 패권 싸움에서 패배했지만 실질적인 로직반도체 시장 패권은 여전히 이들의 손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로직반도체 시장 패권 변화와 관련해 살펴볼 첫 번째 이야기는 패러다임 전환을 바라보는 잘못된 견해다. 우리가 2010년대를 스마트폰 시대라 일컫는 이유는 그 시장의 성장세가 괄목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PC 시장이 붕괴해서가 아니다. 스마트폰 시대가 만들어낸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스마트폰이 만들었다기보다는, PC라는 기성 시장이 연 3억 대 수준의 판매 규모를 유지하며 버텨준 토대 위에 새로운 시장이 개화하며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 스마트폰의 경우는 연 15억 대 수준의 판매고를 올리지만 모바일 AP 시장을 4~5개의 기업이 나눠 가지고, 평균 납품 가격은 70달러(약 7만9000원)가 채 되지 않는다. 반대로 PC 시장은 과점 구조로 CPU, GPU 시장 모두 두 개의 기업이 시장 과실을 나눠 가지며 평균 판매가 역시 상대적으로 낮은 AMD의 CPU 평균 판매가로만 따져도 모바일 AP의 평균 판매 가격의 4배는 족히 넘는다.

로직반도체 시장의 패권과 관련해 이해하고 있어야 할 두 번째 이야기는 이 다음 세대 반도체 시장을 이끌 단어가 데이터센터라는 점이다. 비록 스마트폰 시대에는 기성 로직반도체 진영이 퀄컴, 미디어텍과 같은 신진 진영에 패배해 모바일 AP 시장의 과실을 모두 내주었지만, 이 데이터센터 시장 싸움에서는 이러한 이변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매우 작다. 무엇보다 이 시장이 스마트폰과는 다르게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들이 진입 장벽을 만들어왔다는 점이 이변이 재현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가장 큰 이유다.

데이터센터용 로직반도체로 대표적인 것이 메인 연산을 맡는 서버용 CPU인데 서버용 CPU 시장은 9할의 점유율을 가진 인텔이 오랜 시간 시장을 지배해오며 이들의 제품, 솔루션은 마치 표준처럼 활용되고 있다. 물론 인텔의 지배구조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면 AMD나 엔비디아와 같은 기성 로직반도체 진영일 확률이 높다.


헤테로 컴퓨팅 시장 향하는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들

신규 진입자들에 의한 도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기존 기업들이 쌓아 올린 진입 장벽을 뛰어넘기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서버 시장과 같은 고성능 시장에서 후발 주자들이 시장 정세를 바꿀 만한 제품을 내놓는 것은 쉽지 않고 여기에 최근 데이터센터 시장은 과거처럼 CPU 혹은 GPU 단일 품목에 대한 경쟁력을 넘어 CPU와 GPU 조합으로 구성된 전체 솔루션의 성능, 효율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종 코어 조합 형태를 헤테로 컴퓨팅이라 하는데, CPU나 GPU 한 가지만 집중해도 가능할지 말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신규 진영이 경쟁력 있는 헤테로 컴퓨팅 솔루션을 제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반면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헤테로 컴퓨팅 솔루션을 준비해왔다. AMD는 애초에 CPU와 GPU를 모두 만드는 진영이었고, 인텔은 3년 전 AMD의 그래픽 사업 부문을 이끌던 인물 라자 코두리를 영입해 GPU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엔비디아 역시 마찬가지다. 작년에 무려 400억달러(약 45조2000억원)를 들여 ARM 인수 합의에 성공하며 CPU 역량을 보강했고, 올해는 더 나아가 데이터센터용 CPU인 그레이스를 출시했다.

헤테로 컴퓨팅 시장을 향하는 기성 로직반도체 기업들의 모습, 그리고 점점 삼자 구도로 굳어져 가는 로직반도체 시장의 형세가 눈에 들어온다. 모바일 시대의 끝, 이제 데이터센터가 이끄는 새로운 슈퍼사이클을 맞이하며 우리가 다시금 이들의 이름을 주목해야 할 이유다. 세 기업이 지배하는 로직반도체 시장. 2020년대는 이들이 다시 주인공의 자리에 오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