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영업비밀 침해에 대해 법정 공방을 벌이던 국내 대표 배터리 업체 간 분쟁이 상호 조정과 합의로 마무리됐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그 배경을 두고 말이 많았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와 우리 정부의 중재가 이번 합의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이의 대가로 양사가 미국 현지에 대규모 투자 제안을 했을 것이라는 ‘음모론’에 가까운 논란이 일고 있다.

물론 이런 음모론 같은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한편으로 이해는 된다. 분쟁 당사자 중 한쪽은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와 수조원대 합작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은 1조원 이상을 투자해 미국 현지 공장을 확장할 것이라고 한다. 항간에 떠도는 음모론이 어처구니없이 들릴지는 몰라도 설득력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반도체 산업도 마찬가지다. 국내 최대 기업 대표가 바이든 대통령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미국의 국가 전략을 결정할 주요 회의에 참석하고, 투자 요청을 받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더군다나 수십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무리 투자 대상 지역 주 정부가 대규모 세제 혜택을 포함한 엄청난 당근책을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 전략상 수지 타산이 가장 잘 맞는 입지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일로 인해 미국은 한국 대표 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규모의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양질의 신규 일자리도 대량으로 챙기게 됐다. 한국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현실임이 분명하다. 향후 차세대 자동차나 조선, 철강 등과 같은 국내 주력 산업 부문 전반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대(對)중국 전략이나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전략이 확장될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더 커질 수 있다.

이런 우려가 현실화한다면 연구개발(R&D) 기능은 물론이고 소위 ‘두뇌 유출(brain drain)’이라고 불리는 우수 핵심 인재의 동반 유출조차도 각오해야 한다.

이로 인한 피해는 제품 개발과 제조의 중심이 되는 ‘마더 팩토리(mother factory)’의 기능 훼손으로 이어져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훼손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주력 산업 공동화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전기차 배터리 1공장 전경. 이 공장은 2022년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한다. 사진 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전기차 배터리 1공장 전경. 이 공장은 2022년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한다. 사진 SK이노베이션

혁신 외면한 日 전철 밟아서는 곤란

물론 이 모든 일이 기우(杞憂)에 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철을 되돌아보면 우리 산업의 운명을 그저 운에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한때 ‘일본이 최고(Japan as No. 1)’라고 불리며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보여줬던 일본 산업과 기업들이 지금처럼 된 것을 두고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 외부와 단절된 갈라파고스식 경영 등으로 시장이 원하는 혁신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흔히 지적한다. 물론 그 전에 엔화 가치 절상을 통해 일본의 경쟁력을 약화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라는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견제도 한몫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이든 정부가 우리나라를 상대로 과거 일본에 했던 것과 같은 노골적인 견제를 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행보의 이면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 행정부만큼이나 미국 우선주의가 깔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피할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본 기업과 산업이 밟아온 전철을 굳이 한국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