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정규직 공개채용 현장에서 지원자들이 면접을 보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기업 정규직 공개채용 현장에서 지원자들이 면접을 보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김우창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김우창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부모를 잃고 계모와 이복 언니들에게 구박만 받던 젊은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왕자의 눈에 들어 인생 역전한다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다. 주경철의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에 따르면 전 세계에 300개가 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있다고 한다. 어느 나라에서 최초로 신데렐라 스토리가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별, 시대, 신분을 초월해 신데렐라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것만은 명확해보인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현실에도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사흘 뒤인 2017년 5월 12일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공항을 찾아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약속은 잘 지켜졌다. 새로운 정권의 출범을 앞둔 현시점, 공공 부문에서 최소 20만 명가량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통틀어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이 14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아주 큰 수치다. 20만 명 중 75%가량이 원래 소속이었던 공공기관에 직고용이 되었고, 나머지 25% 정도만이 자회사 혹은 제3의 기업에 입사하는 방식으로 전환됐으니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일성으로 내세웠던 정책적 목표는 양적, 질적으로 모두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노동 문제,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20세기 말, 외환위기를 겪던 우리나라에 국제통화기금(IMF)은 노동 시장의 유연화, 즉 비정규직 도입을 달러화 교환 조건으로 제시했고, 우리나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IMF 전에는 ‘상사맨’ ‘현대맨’ ‘삼성맨’ 같은 표현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평생직장이 많았지만, 노동 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바뀌게 됐다. 회사는 언제든 직원을 해고할 수 있게 됐고, 실직 불안에 떠는 직원은 먼저 다른 회사를 찾아 떠났다. 이직과 재취업이 활발해지면서 경력자가 아니면 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마저 도래했다.

당시 정부는 비정규직을 도입해 직무 경험을 쌓게 한 후 차차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노동 시장 구조를 계획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 채용 이전의 경험용으로 활용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는 정규직도 쉽게 해고할 수 있어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애초 계획처럼 노동 시장의 변화는 생기지 않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가지의 사회적 계층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 차별적 처우, 위험한 환경 노출 등 우리 사회 ‘부조리의 엑기스’ 같은 대우를 받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권의 비정규직 제로 선언이 갖는 정책적 지향점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노동 시장의 부조리를 없애는 것은 시대적 소명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생길 문제점을 버텨낼 사회적 체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지난 5년간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시도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공정성 논란, 세대 갈등과 그에 따른 조직 내 갈등, 정규직 전환자에 대한 업무 및 임금 차별 등 깊은 고민 없이 결과만 보고 실행한 정책은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권의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에 대한 많은 논의 중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분야가 있다. 우리 사회의 혁신 잠재력인 연구 분야에 대해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최고 수준의 기술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연구는 실패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고, 극소수의 연구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혁신의 문법이다. 따라서 최고 수준의 기술적 혁신은 오랜 기간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곳에서만 탄생한다. 단적인 사례가 미 국방부 소속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다. 이곳은 단일 기관으로는 전 세계에서 최대의 연구비를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3년 안에 상업화하면 오히려 실패한 사업이라고 보고, 고위험 고수익 연구만을 수행한다. 그 결과 인터넷, 드론, GPS, 자율주행차, 음성인식 기술 등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사기업이 실패를 두려워할 때 미국은 공적 영역에서 실패마저 독려했고, 끝내 세상을 바꿀 기술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연구기관의 특징은 연구자의 고용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장해준다는 점이다. 초기에 좋은 성과를 낸 사람들에 한해서 종신 고용을 한다. 현재 많은 대학이 교수 인사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는 테뉴어(영년직)제도와 동일하다. 처음에는 비정규직으로 임용하지만 몇 번의 재계약을 거쳐 추후 충분히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있다면 종신 계약을 하게 된다. 테뉴어제도는 최고의 성과를 보인 사람에게만 무제한적인 실패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떤가.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행정직에만 적용됐고 연구 인력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3년짜리 연구 프로젝트의 비정규직 사무보조원은 어느 날 갑자기 63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이 됐고, 연구를 실제로 수행해오던 박사급 인력은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이제야 노동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1990년대생 박사급 인력들에게 정년 보장의 가능성이 있는 정규직은 먼 나라 이야기가 돼 버린 것이다.

이는 공공 분야에서 1990년대생이 도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는 혁신적 결과를 창출할 젊은 인재가 공공 영역에서 안정된 연구를 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막아버렸다. 당장 드러나지는 않겠으나, 머지않은 미래에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사회는 너무 삭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신데렐라가 많이 나오는 사회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특정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 본인의 노력이나 재능과는 무관하게 권력자의 즉흥적이고 무작위적인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다수의 구성원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사회의 진보는 쉽게 달성되지 않는 법인데, 우연히 왕자님의 눈에 드는 것 외엔 성공하는 방법이 없다면 누가 노력을 하겠는가. 그런 사회에서 능력과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발전시킬 생각보다는 뒤엎고 파괴시키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민할 것이다. 역사책에는 그렇게 사라져간 수없이 많은 국가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