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서울대 법학 학사, 미 조지타운대 조세법 석사, 사법연수원 29기, 사법시험 39회, 전 춘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
김성환
서울대 법학 학사, 미 조지타운대 조세법 석사, 사법연수원 29기, 사법시험 39회, 전 춘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

새해의 의미는 모두에게 각각 다르게 다가온다.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일 년살이는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하고, 저장한 후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하는 일의 순환일 것이다.

세금을 업으로 하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한 해 달력은 우선 납세자가 챙겨야 하는 각종 세금의 신고와 납부 시기들로 채워진다. 3월 말은 많은 법인이 법인세를 신고·납부해야 하는 때이고, 5월 말은 개인이 종합소득세를 신고·납부하는 시기다. 1·4·7·10월은 부가가치세의 예정 및 확정 신고와 납부가 필요한 때다.

연초 가장 많이 보도되는 세금 뉴스는 바로 근로소득세 연말정산에 관한 것이다. 연말정산 신고를 하는 근로소득자 수가 2000만 명에 달하다 보니 대중적인 관심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평소 세금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연말정산을 위한 여러 증빙서류를 챙기고 연말정산 항목들을 입력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기가 한 해 동안 벌어들인 근로소득이 어떻게, 얼마나 과세되는지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흔히 나오는 불평은 막상 연말정산을 해봐야 돌려받는 돈이 거의 없거나 오히려 토해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은 몇 년 전 근로소득세제가 소득공제를 대폭 축소하고 세액공제로 전환함에 따라 급격히 많아졌다. 아울러 근로소득세제 곳곳에 여전히 있는 비합리적인 내용도 불만 고조에 한몫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해 7월 선고된 대법원 판결은 매우 흥미롭다. 대법원의 ‘2020. 7. 23. 선고 2016두48294 판결’에서 문제가 된 쟁점은 당시 근로소득공제 대상으로 규정된 ‘근로자가 직접 부담하는 의료비’ 범위에 보험금으로 받은 의료비도 포함되는지였다.

현재는 의료비가 세액공제 대상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소득공제 대상이었고, 현재 시행령에 있는 ‘실손의료보험금을 받은 의료비는 제외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었다.

1심 법원은 실손의료보험금을 받았더라도 의료비 공제가 인정돼야 한다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했고, 2심 역시 같은 취지였다. 이어 대법원은 만 4년이나 흐른 후 같은 취지로 상고기각 판결을 선고했다.

대법원에는 ‘심리불속행 기각’이라는 제도가 있다. 형사 사건을 제외하고 민사·가사·행정 사건에서 굳이 세세한 판결 이유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면 접수된 날부터 4개월 이내에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흔히 줄여서 ‘심불’이라고 한다)로 간단히 종결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그러나 상고하는 당사자들은 이른바 ‘심불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 어렵다.

그런데 1심과 2심의 결론이 똑같고 문제 된 세금 액수도 얼마 되지 않았을 이 사건에서 왜 대법원이 심불을 하지 않고 그토록 오랜 시간 고민한 것일까? 그전에 납세 의무자가 그다지 경제적 이익이 크지도 않았을 이 사건을 대법원에까지 상고해서 호소하고자 한 억울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 세법은 글귀에 따른 해석을 우선하므로(판례는 이를 ‘엄격 해석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먼저 납세자가 주장하는 의료비 공제가 세법의 글귀에 맞아떨어지는지부터 살펴보자.

실손의료보험금을 나중에 받더라도 납세자는 일단 의료비를 자신의 돈으로 지출해야 한다. 당시 법에 정해진 ‘직접 부담한 의료비’라는 문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

실손의료비보험금 청구를 통해 나중에 받게 되는 보험금은 때에 따라 해를 넘길 수도 있고, 이를 지급받았다고 해서 납세자가 자기 돈으로 의료비를 지출했다는 사실 자체까지 소급해서 없어져 버리지 않는다. 현재와 같이 실손의료보험금을 받은 의료비는 제외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근로소득공제 대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출발점이 됐다.

게다가 실손의료보험금은 납세자가 보험에 가입해서 보험료를 납부한 덕분에 받는 돈이다. 자신의 노력과 자금 지출을 통해 얻은 보험금 때문에 그러지 않은 납세자보다 의료비 공제에서 불리하게 취급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실손의료보험료도 소득공제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보험료와 보험금을 둘 다 공제받을 수 있게 되면 이중 공제가 된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손의료보험료의 소득공제 한도는 100만원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자동차보험료와 같은 다른 보장성 보험료와 합쳐서 적용되는 한도인 탓에 실제로 실손의료보험료의 소득공제를 받기도 쉽지 않다.

실정법의 해석을 논외로 하고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면에서도 비판이 가능하다.

근로소득자는 자신의 몸을 자산으로 삼아 소득을 벌어들인다. 사업소득자나 법인이 기계 장치와 같은 자산을 수리하는 비용을 필요경비로 인정받는 이상, 근로소득자가 자기 몸을 치료하기 위해 지출한 의료비도 당연히 ‘필요경비’의 하나로서 근로소득 계산에 반영돼야 한다.

의료비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일하려면 쉬어야 하고, 먹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기본적인 의식주 비용 역시 근로소득 계산에 반영돼야 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적인 비용까지 전부 공제해줄 수는 없고, 현행법상으로도 일부 주거 관련 비용 등이 공제 대상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현행 근로소득세제에서 근로소득자에게 인정되는 각종 공제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정작 의료비 공제 판결에서 대법원은 자세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4년간 고민한 사건치고는 허무할 정도로 짧게 원심의 결론을 유지한다는 내용만 판시했다. 판결 이유 부분만 보면 채 한 쪽 분량도 되지 않는다.


직장인들의 관심사 연말정산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직장인들의 관심사 연말정산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납세자에게 불리한 근로소득세제

그런데도 이 간략한 판결에 담긴 함의와 그 바탕에 깔린 고민의 깊이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 앞서 본대로 현행법은 실손의료보험금을 받은 의료비는 일체 공제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개정됐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보다 실손의료보험금을 받은 경우에 그 보험료와 의료비 중에서 공제 대상을 선택할 수 있도록 납세자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침소봉대’라는 반박이 나올 수 있지만, 의료비 공제 부분만 놓고 보더라도 현행 근로소득세제는 납세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근로소득세제에 관한 법적인 분쟁은 국민 다수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그 파급효과가 상당하지만, 그에 비해서 의미 있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특히 각종 공제에 관한 부분은 더욱 그러한데, 개별 사건으로 보면 다툼의 대상이 되는 세액이 크지 않아서 납세자가 문제의식을 느끼더라도 다투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료비 공제 판결에서 대법원이 ‘심불 문턱’을 넘겨 고민할 수 있도록 다퉈준 납세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러한 노력이 헛수고에 그치지 않도록 새해에는 근로소득세제를 중심으로 한 세법이 한층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