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대표적인 투기 사례는 1630년대 네덜란드 튤립 투기다. 당시 가장 비싼 종류였던 ‘황제 튤립’ 한 뿌리는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가격에 해당하는 1200플로린에 거래됐다. 네덜란드의 1630년대는 군사적 평화와 경제적 안정을 누리던 안락한 시기였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몰락으로 해상의 위협이 사라졌고 30년 전쟁으로 경쟁자였던 동유럽의 직물 산업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직물 산업은 독점적 위치를 점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자카르타 지역을 차지한 동인도회사의 주가는 역사적 고점을 갱신하고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고 암스테르담 교외에는 대저택 건설 붐이 일었다. 부의 향유에 길들여진 국민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탐욕에 들떠 있었고 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대열에 끼고 싶어 안달이었다.

칼뱅주의로 대변되던 근면·성실한 네덜란드인의 일상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투기장을 찾아다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치와 투기로 북적이던 사회 분위기가 역사상 조롱거리가 되다시피 한 튤립 투기 붐을 조장한 배경이다. 1637년 2월 튤립 시장은 붕괴했고 부도 행렬이 네덜란드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1980년대 일본도 투기 열풍에 온 나라가 휩싸였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주도해온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위협하는 국가로 간주할 정도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실현했다. 세계 최대 무역흑자를 통해 유입된 자금들은 국내외 주요 자산에 투기 붐을 일으켰다. 먼저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56년부터 1986년까지 30년 동안 일본의 땅값은 50배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에 소비자물가는 단지 두 배 상승하는 데 그쳤다. 토지나 주택을 사기 어려워지자 일본 국민은 골프 회원권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골프 회원권이 투자 대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닛케이 골프지수’를 발표하기도 했다. 1980년 100으로 시작한 이 지수는 1990년 1000까지 상승했다. 주식 가격도 날아올랐다. 닛케이지수는 1980년대에만 5배나 상승했다. 도쿄증시의 평균 주가수익률(PER)은 90배까지 상승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주식 이야기가 주제였다. 자산 가치가 증가하자 개인이나 기업들이 부의 효과에 취하여 고급 소비를 늘렸고 일본인은 세계 명품 소비의 큰손으로 등장했다.

성실함의 상징이었던 일본 기업들도 영업이익보다 재테크를 통한 수익이 더 높았을 정도로 투기에 골몰했다. 해외 예술품과 부동산에 대한 일본인의 투자도 급속히 증가했다. 주식보다 안전한 자산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피카소, 샤갈, 르누아르의 작품들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뉴욕의 록펠러센터와 엑손빌딩이 일본에 넘어갔고 할리우드의 콜롬비아까지 소니에 매각됐다. 돈이 될 만한 모든 것에 일본의 투자가 이뤄졌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일본 증시의 폭락과 더불어 은행 시스템이 붕괴하고 일본의 부동산 가격도 폭락했다. 부채 비율이 치솟자 일본이 사들였던 전 세계의 자산은 다시 매물로 등장했다. 일본 경제가 장기 저성장으로 빠져드는 서막이었다.


국내 자산시장도 버블 징후 분명

우리나라 자산시장도 투기가 유행하고 버블의 징후가 분명하다. 강남 아파트 가격이 1년에 10억원 상승한 부동산 시장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주식시장도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후 정체를 보이다가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최근 코스닥지수는 1000을 넘어 고점을 갱신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주식 이야기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코인 애플리케이션(앱)이 유행하고 거액을 번 젊은이들의 무용담이 횡행한다.

문제는 투기와 버블 이후다. 버블을 어떻게 충격을 최소화하여 제자리로 돌리는가에 의해 우리 경제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투기에 쏠린 사회적 관심이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성실히 일하고 정당하게 자산을 불려가는 다수가 사회를 지탱해가도록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는 버블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