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도시 바젤은 유연한 도시 브랜딩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타깃층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슬로건과 로고를 각각 만들었다.
스위스 도시 바젤은 유연한 도시 브랜딩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타깃층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슬로건과 로고를 각각 만들었다.
황부영 브랜다임앤파트너즈 대표컨설턴트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전 넷밸류코리아 한국지사장, 현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마케터의 생각법’ ‘레인메이커’ 저자
황부영 브랜다임앤파트너즈 대표컨설턴트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전 넷밸류코리아 한국지사장, 현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마케터의 생각법’ ‘레인메이커’ 저자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브랜드는 이름일 뿐이다. 전매청이 담배 사업을 독점하던 시절, 그때의 담배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 브랜드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청자·썬·아리랑·한산도·은하수 등은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 같은 가격대에 물성이 비슷한 경쟁 제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산 담배는 아예 불법 제품인 시절이었다. 당연히 경쟁사도 없었다. 그때의 담배 브랜드는 고작해야 ‘독하다’ ‘싸다’ 같은 물성적 특징으로 구분되는 이름에 불과했다. 브랜드의 성공 사례로 거론되던 ‘말보로’는 1989년 담배 수입 전면 자유화 이전까지는 우리에게 책에서나 나오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국가나 도시는 숙명과도 같았다.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벗어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 브랜딩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도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도시 브랜딩은 중요해졌다. 이주하는 것도, 여행으로 방문하는 것도 이제는 여러 선택 대안 중에서 고를 수 있는 일이 됐다. 과거 서울 사람에게 강원도 양양이나 고성은 큰맘 먹지 않으면 가 볼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고속도로·철도 등 교통 인프라의 발전은 거리감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9년이 돼서야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됐다. 그전까지 미국 뉴욕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일반인에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이제 사람들에게 도시는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를 지닐 뿐 ‘숙명과도 같은 곳’은 아니다. 고르는 사람에게 선택 대안이 많아진다는 것은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의 도시에는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뜻이 된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당연히 브랜딩이 중요해진다. ‘남다른 자기다움’으로 강렬한 생각·연상·단어를 남겨 억지로 팔지 않아도 스스로 팔리게 만드는 브랜딩이 경쟁 회피의 해법으로 부각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도시 브랜딩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도시 브랜딩에는 일반적인 제품 브랜딩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동차 회사 ‘볼보’를 브랜딩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포지셔닝, ‘가장 안전한 자동차’가 고객에게 잘 전달되고 또 경험되도록 하는 것이다. ‘안전’이란 브랜드 에센스가 볼보의 차별적인 가치로 정렬돼 고객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들면 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안전’이라는 단어 하나만 남길 수 있으면 볼보의 브랜딩은 성공한 셈이다.

도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하나의 단어나 슬로건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모두 담을 수 있을까. 도시의 정체성과 지향 방향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한 마디만 남겨도 되는 일반 제품 브랜딩과는 다르다. 브랜딩할 때 기업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할 타깃 집단을 명확하게 정의한다. 라이프 스타일이 비슷한 동질적인 집단을 타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도시는 그렇지 않다. 도시는 서로 다른 니즈를 가진 여러 층의 고객이 공존한다. 하나로 묶일 수 없는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별도의 고객 집단이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도시 브랜딩의 목표는 두 가지 방향을 향한다. 우선 현재 사는 사람이 떠나지 않도록, 다른 도시를 거주지로 택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자부심을 주어야 한다. 내부 지향 목표다. 먹고살 만한 것이 있어야 사람들은 안 떠난다. 그래서 기업 유치, 투자 유치 등도 내부 지향 활동으로 포괄된다.

두 번째 목표는 다른 나라나 도시에 사는 사람이 내가 사는 도시로 많이 찾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관광을 위해서든 여행을 위해서든 타지 사람이 많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 지향 목표다. 관광에는 비즈니스 관광도 있다. 비즈니스 관광도 외부 지향 도시 브랜딩 활동이 된다. MICE(기업 회의, 포상 관광, 컨벤션, 전시회) 산업을 의미한다. 다보스포럼으로 유명한 다보스는 포럼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최근 들어 도시 브랜딩을 본격화한 지역은 내부 지향 목표와 외부 지향 목표를 조금씩 구분해 브랜딩에 반영하는 경향을 보인다. 브랜딩의 방향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슬로건이나 로고 등 브랜딩 요소다. 그래서 도시 슬로건과 도시 관광 슬로건을 별도로 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나 충북 제천이 그런 경우다. 잘츠부르크의 도시 슬로건은 ‘Stage of the world(세계의 무대)’, 관광 슬로건은 ‘잘츠부르크 랜드(Land)’다. 제천의 도시 슬로건은 ‘자연치유도시 제천’, 관광 슬로건은 ‘휴윗제천’이다.


요즘은 도시와 관광청 로고를 이원화하는 일이 빈번해졌지만, 과거 바젤의 전략은 파격적인 접근이었다. 사진 황부영
요즘은 도시와 관광청 로고를 이원화하는 일이 빈번해졌지만, 과거 바젤의 전략은 파격적인 접근이었다. 사진 황부영
잘츠부르크와 제천은 도시 슬로건과 관광 슬로건을 별도로 쓰는 도시 사례다. 사진 황부영
잘츠부르크와 제천은 도시 슬로건과 관광 슬로건을 별도로 쓰는 도시 사례다. 사진 황부영

도시·관광 로고 이원화의 시작, 바젤

스위스의 작은 도시 바젤은 유연한 도시 브랜딩의 모범 사례다. 오랜 시간 숙고 끝에 바젤은 내부 지향 목표와 외부 지향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슬로건 하나로, 로고 한 개로 브랜딩된 것처럼 굴지 않았다. 바젤은 도시 브랜딩의 영향을 받는 다양한 고객 집단을 모두 잡으려고 했다. 내부 지향 브랜딩의 타깃이 되는 지역 주민과 기업·투자자, 외부 지향 브랜딩의 목표 고객인 관광객과 MICE 업체 중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바젤은 타깃 고객에 따라 ‘Made in Swiss’와 ‘Cross-Cultural City’라는 콘셉트를 구분해 사용했다. 바젤의 공식 BI(Brand Identity·브랜드 아이덴티티)에는 스위스 국기를 달아 ‘스위스 도시’임을 강조하고, 관광청 BI에는 ‘Culture Unlimited’ 슬로건을 강조했다. 요즘에야 도시와 관광청의 로고를 이원화하는 사례가 빈번하지만, 당시 바젤의 전략은 파격적인 접근이었다.

바젤은 인구가 채 20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충주·안동·안성 정도 규모의 도시다. 이 소도시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1999년 11월 ‘바젤의 도시 마케팅을 위한 첫 걸음(City Marketing for Basel–the first steps)’이란 프로젝트가 승인을 받는다. 그리고 도시 브랜딩 전략을 수립하는 데 5년의 노력을 쏟았고, 일관성 있는 브랜딩을 위해 2005년 1월 도시 마케팅 부서가 신설된다. 2021년 현재 바젤은 아트 바젤(ART-BASEL)로 불리는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보석박람회(BASEL WORLD)’를 개최하는 스위스 산업의 허브로 성장했다. <下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