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1913~94·오른쪽)의 사임을 보도한 당시 뉴욕타임스(NYT) 지면. 사진 NYT
1974년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1913~94·오른쪽)의 사임을 보도한 당시 뉴욕타임스(NYT) 지면. 사진 NYT
이철원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사법연수원 28기,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로스쿨, 현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이철원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사법연수원 28기,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로스쿨, 현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살인자가 격발한 권총의 총구에서 나오는 연기라는 뜻에서 비롯된 ‘스모킹건(smoking gun)’이라는 표현은 형사 사건에서 혐의를 인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증거를 의미한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탄핵을 부른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 대통령이 본인의 참모에게 불법 도청 사실을 은폐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한 대화가 담긴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자 미국 언론에서 그 녹음테이프를 스모킹건이라고 일컬었고, 이후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됐다.

형사 절차가 아닌 민사 분쟁 절차이지만 국제상사 중재도 판단자인 중재인이 증거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법률을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출되는 증거의 중요성은 무겁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스모킹건을 찾아내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상대방에게 문서 요청할 수 있는 국제상사 중재

특히 국제상사 중재는 상대방에게 문서를 요청할 수 있는 ‘문서 개시 절차(document production)’가 있는 경우가 많아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만 제출하는 국내 소송과는 그 양상이 다르게 전개되고는 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대륙법계 전통을 따르는 한국의 민사소송 절차에서는 ‘변론주의’라고 해 당사자들이 각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를 제출하면 이를 기초로 법원이 증거를 평가하고 과거에 발생한 사실을 확정한다. 당사자들로서는 입증에 실패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이 인정되지 않을 뿐 상대방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이러한 심리 방식은 한쪽 당사자만 가지고 있는 사건 해결의 열쇠인 스모킹건이 제출되지 않고 사실의 일부가 드러나지 않은 불완전한 사실확정 상태로 법원 판결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 대법원도 “민사재판에서 법원은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있는 사실관계에 대해 처분권주의와 변론주의 그리고 자유심증주의 원칙에 따라 신빙성이 있다고 보이는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를 받아들여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민사판결의 사실인정이 항상 진실한 사실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라고 인정한 이유다(대법원 2017. 12. 5. 선고 2017도15628 판결).

반면, 영미법계 민사소송 절차는 실체 진실 발견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증거가 한쪽 당사자에게만 편재돼 있어서 사실 심리가 불완전하게 이뤄지는 것을 막고자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요청에 따라 자신에게도 불리한 문서를 제출할 의무를 부담시키는 문서 개시 절차가 잘 발달했다.

당사자들이 그러한 의무를 위반하면 그 위반 당사자에게는 불리한 사실의 추정(adverse inference)뿐 아니라 법정모독죄, 변호사 징계 등 강력한 제재를 통해 그 철저한 이행을 담보하고 있다. 올해 6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민사소송법 개정안에 “문서 제출명령을 활성화함으로써, 증거의 구조적 편재 현상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당사자의 증거수집권 확충에 따른 법원의 사실심 심리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이유가 제시돼 있는데, 이 법안은 영미식 문서 개시 절차를 우리 민사소송 절차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영미법계 이념 반영된 국제상사 중재 절차

국제상사 중재 절차는 이러한 영미법계 소송 이념이 어느 정도 반영돼 문서 개시 절차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국제상사 중재를 예정하거나 진행하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국내 소송 준비보다 더욱 철저한 문서의 수집과 전략적 고민이 필요하다.

특히 영어로 진행되는 국제상사 중재 절차에서는 영미법계 소송 절차의 훈련을 받은 중재인들이 관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문서 개시 절차에 잘 대응하지 못한 기업이 유리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는 편견을 받아 불리한 판단을 받는 사안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국제상사 중재를 앞둔 기업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서 개시 절차를 단순히 소극적인 방어 수단이 아니라 승리를 가져오는 스모킹건을 찾아내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만들 수 있을까?

먼저 유의할 점은 문서 개시 절차에서 상대방만 가지고 있는 스모킹건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봐도 해당 기업이 그 사안의 성격에 비춰 가지고 있어야 하는 당연한 스모킹건들을 잘 수집하고 제출해야 문서 개시 절차에서 도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적은 양의 종이 문서로 회사의 업무가 기록돼 있고 임직원들 사이의 상세한 논의 내용은 대부분 증인의 기억에 의존할 뿐 그 기록 자료가 없었다. 하지만 정보기술의 발달로 회사 내의 의사 결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자 문서들이 작성되고 이메일과 메신저를 통해 임직원들이 나눈 대화가 보존될 수 있게 됐다.

중재인들은 어느 정도 조직이 갖춰진 기업이 당사자라면 당연히 그러한 자료들이 제출될 것을 기대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 그런 자료가 제출되지 않으면 기업이 사실을 은폐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증인의 증언 과정에서 기업이 존재하는 문서를 은폐하였다는 사정이 밝혀지면 그 기업은 사안 자체의 유불리와 무관하게 패소하기도 한다.

따라서 국제상사 중재를 준비하는 초기에 관련 임직원들의 업무용 컴퓨터에 저장된 전자문서와 이메일, 메신저 자료를 확보하고 이를 분석해 관련 증거를 적절하게 제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하지만 기업 임직원들 입장에서는 업무상 내용뿐 아니라 일부 사생활 내용도 포함돼 있을 수 있는 자신의 컴퓨터 전자문서와 이메일, 메신저를 변호사에게 제공하는 것이 매우 거북한 일이다. 임직원들의 잦은 인사이동으로 과거 전자 정보자료들의 행방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검찰과 공정위의 압수 수색을 당한 경험이 있는 기업들은 과거 기록을 없애기 위해 전자문서와 이메일의 자동 삭제를 권고하는 경우도 있다. 임직원들이 자신의 눈으로 보아 회사에 불리한 내용이 있다고 생각되면 이를 삭제하거나 숨기려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결국 경영진이 적극적으로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해당 임직원들에게 협조를 촉구하지 않는 이상 자료 수집이 쉽지 않고, 소극적이고 불완전한 문서 제출은 국제상사 중재에서 있어야 할 스모킹건을 제출하지 못하게 되는 위험을 발생시킨다.


회사 전산 플랫폼 명확히 파악해야

최근 문서 수집에 있어서 중요한 원천 중 하나가 회사 내부적으로 사용되는 각종 전산 플랫폼 자료다. 기업들은 흔히 전사적 자원 관리라고 부르는 ‘ERP’ 플랫폼을 폭넓게 사용하고, 그 플랫폼에 인사 관리, 회계 관리, 생산관리, 물류 관리, 고객 관리 등의 각종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입력하고 관리한다.

문서 개시 절차에 따라 제출해야 하는 정보가 ERP 플랫폼에 보관돼 있을 때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정보를 추출해 제공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업 입장에서 영업비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원가 정보, 고객 정보를 제출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규모가 큰 기업에서는 각 부서가 필요에 따라 만들고 ERP로 통합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자체 전산 데이터 플랫폼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회사에서 사용하는 전산 플랫폼의 현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를 제출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상대방으로부터 스모킹건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사안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방이 제출한 자료와 언론 등 공개된 자료를 활용해 상대방이 가지고 있을 문서들을 유연한 생각으로 추론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안에 관여한 상대방 임직원들에 대한 파악과 상대방 회사의 의사 결정 과정, 상대방 회사의 거래처, 협력회사, 투자자, 모회사, 인허가 기관, 주거래 은행과 사이에 이뤄졌을 커뮤니케이션, ERP 플랫폼 자료 등을 나열하고 변호사들과 회사 임직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스모킹건을 찾아낼 가능성이 커진다.

모쪼록 국제상사 중재를 준비하고 대응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스모킹건을 찾아내어 자신의 권익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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