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라는 용어는 확률적으로 아주 일어나기 힘든 재난이 닥쳤지만, 아직 실제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가 모르는 척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이 저서 ‘늦게 와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2017)’에서 환경 파괴가 야기한 기후 변화 문제를 지적하면서 만든 말이다. 호주에서 발견된 ‘검은 백조(Black Swan)’처럼 발생 가능성이 아주 작은 사건과 움직이면 온 집 안이 박살 날 수 있는 ‘방 안의 코끼리’를 합성한 용어로, 대응하지 않고 있는 재난 상황을 지칭하는 데 자주 쓰이고 있다. 기후 변화, 인구 감소, 고령화, 국가 부채, 가계 부채 등 여러 사회적 도전은 제때 대응하지 않으면 검은 코끼리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코끼리처럼 덩치가 커지기 전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거나 빨리 집 밖으로 내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검은 코끼리가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나라들도 있다. 국가 지도자들이 자신의 임기 동안에 비용을 치르는 부담을 지지 않으려 하거나 중장기적인 정책을 시행할 여건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하는 국가들이다. 2021년 6월 말 현재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필리핀, 멕시코, 파라과이, 파나마, 콜롬비아 6개국이다. 임기는 한국, 파나마, 파라과이는 5년, 필리핀과 멕시코는 6년, 콜롬비아는 4년이다. 이 국가들은 대부분 군사독재의 역사가 있어서 단임제를 채택한 나라들이다.

그러나 단임제 정권은 국민으로부터 다시 평가받을 필요가 없어서 오히려 비민주적이거나 편파적인 정책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중장기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이유도 없다. 그 결과 콜롬비아와 멕시코는 경제 위기가 반복돼서 모건스탠리가 취약국으로 지정한 바 있으며 우리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저소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불안한 정치 리더십이 키우는 ‘검은 코끼리’

정치적 리더십이 불안정한 경우도 검은 코끼리를 자라도록 만든다.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2000년부터 지금까지 11명의 총리가 교체됐다. 특히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년간은 매년 총리가 교체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장기 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 총리가 잃어버린 20년의 사슬을 끊는가 했는데 지난해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1년 만에 다시 교체됐다. 일본이 불안해 보이는 이유다.

우리나라도 대통령 단임제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를 막고자 5년 단임제를 채택한 이후 34년째 이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단임제 대통령은 차기 선거를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지자만 고려하는 편파적 정책을 시행할 가능성이 크다. 빠른 레임덕 때문에 임기는 5년이지만 실제로는 3년짜리 대통령이라는 비판도 있다. 일회성 정책이나 단기적 정책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후임 대통령은 자기 이름을 붙인 정책을 시행하려고 전임자의 정책을 이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7월 2일 제네바 본부에서 개최된 제68차 이사회에서 한국을 개도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그 지위를 변경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적 수준이 국제 사회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군사독재를 우려하던 시기는 지났다. 지금은 선진국으로서 더 효율적이고 모든 국민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정책의 시계가 단기에 그치는 제도적 한계 때문에 우리 사회에 알려진 문제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척 지나치는 검은 코끼리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부동산 버블, 가계 부채, 노인 빈곤, 인구 감소가 초래할 연금 부족, 수도권 인구 집중에 따른 지방도시 소멸, 전기차 전환으로 야기될 내연기관 관련 기업 종사자의 대량실업 등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지금 내년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경선이 한창이다. 이번에 당선되는 대통령은 임기 내에 지금의 제도를 바꿔야 한다. 대통령 연임제건 내각책임제건 지도자에게 재임 기간의 정책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통령 단임제 그 자체가 우리나라의 검은 코끼리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