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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 전 대성합동지주 사장, 전 디큐브시티 대표, 전 CJ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
전 대성합동지주 사장, 전 디큐브시티 대표, 전 CJ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1│상하기수(上下其手)

중국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한 ‘좌씨전(左氏傳) 양공(襄公) 26년 조’에 나오는 고사를 소개한다.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쳐들어가서 초나라 장수 천봉술(穿封戌)은 정나라의 장수 황힐(皇頡)을 포로로 잡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초나라 왕의 동생인 위(圍)라는 이가 아랫사람의 공로를 차지하려고 왕에게 자기가 포로를 잡은 것이라 보고했다. 천봉술이 반발하자 왕은 재상 백주리(伯州犁)에게 판결을 맡겼는데, 백주리는 직접 황힐에게 누구에게 잡혔냐고 물어보았다. 백주리는 황힐에게 손을 위로 들고 왕의 동생을 가리키면서 임금의 동생이라 했고, 손을 아래로 향해 천봉술을 가리키며 변방의 현감이라 말했다. 그러고 나서 황힐에게 두 사람 중 누구에게 잡혔는지를 물었다. 손짓의 뜻을 알아챈 황힐이 목숨이라도 구할 양으로 왕의 동생에게 잡혔다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상하기수(上下其手)’란 사자성어가 나왔다고 한다. ‘위, 아래로 손을 들어 신호한다’는 뜻으로 권력에 따라 판단을 바꾼다는 의미이나, 이 일화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공을 자기 것으로 치부하거나 그 공에 편승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직장에서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어떤 부서의 조직원이 아랫사람이 큰 업적을 세웠을 때 공을 세운 당사자와 그의 바로 윗상사 간에 공 배분은 인사 담당자는 물론 최고경영자(CEO)에게도 큰 고심거리다. 그 조직원이 공을 세운 것은 ‘그의 상사의 조력과 리더십에도 조금이라도 힘입은 바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조직 내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필자도 회사원 시절 회사 내에서 직원의 상사가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는데도 상사가 그 공을 거의 다 차지하고 좋은 업적 고과와 나아가 승진까지 챙기는 경우를 종종 본 적이 있다. 문제는 그 후유증이 두고두고 남아 직원 전체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2│부하 희생으로 얻은 상사의 성공

할리우드 영화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은 1998년 개봉됐다. 제임스 존스(James Jones)라는 작가가 1962년 출간한 소설을 두 번째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는 태평양 전쟁 초기 과달카날섬에 상륙한 미 보병사단의 이야기를 다룬다. 배우 존 트라볼타가 배역을 맡은 퀸타드 장군은 또 다른 명배우 닉 놀테가 열연한 톨(Tall) 중령을 불러 일본군이 차지한 한 고지의 점령을 지시한다. 만년 중령인 톨은 전선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무전기를 통해 기관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고지로 병사들의 쉴 새 없는 돌격을 명령한다. 당연히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중대장이 우회공격을 제안해도 묵살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앞세우는 부하들의 희생은 별로 중요한 고려 요인이 아니다. 오직 목표 달성만이 중요하다. 고지를 점령해야 상사의 인정을 받아 대령이 되고, 나아가 장군 승진까지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톨 중령은 이렇게 일갈한다. “대위, 당신의 중대에서 희생은 나오게 돼 있어. 나는 이 기회를 일생 동안 기다렸단 말이야. 나는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이와 같은 경우는 앞의 사례보다 직장 내에서 훨씬 자주 목격된다. 부하 직원을 믹서기에 갈아 넣듯이 내몰아서 성과를 내며, 정작 그 과정에서 부하 직원이 과로와 스트레스로 건강에 이상이 생겨도 모르는 체하는 상사의 유형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이 승승장구하여 조직의 장까지도 거머쥐는 경우를 상당수 봤다. 앞의 두 사례는 각각 부하 ‘뒤 세우기와 앞세우기’라 부를 만하다. 부하가 자신의 도움이나 지시 없이 성과를 내어도 그를 내 뒤에 세우고 내가 했다고 나서거나, 어려운 상황이 닥쳐 직접 나서기 힘든 경우에 부하 직원을 동원하여 해결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둘을 잘하는 상사들의 공통점은 결과적으로 아래가 세운 공을 어떡하든 모두 자기에게 귀속시킨다는 것이다.  

요즘 나라 안의 상황은 뒤숭숭하지만 대한민국의 대외적 위상은 크게 올라간 모습이다. K-반도체, K-배터리, K-조선, K-바이오 그리고 K-방산까지 제조업은 물론 K-팝, K-드라마, K-컬처, K-푸드 등 소프트 파워가 맹위를 떨치고, 미⋅중 무역전쟁에서 그 중요성이 높아진 반도체 등 소위 전략 물자들의 종주국으로서 구미 각국에서 한국에 대한 구애 공세가 드높다. 특히 이들 ‘K시리즈’ 간에 시너지도 나면서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해외 수요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정부의 조력도 일부 있겠으나 거의 다 우리 기업들의 공이다. 그래서인지 2021년 수출액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관련하여 2021년 12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은 ‘무역의 날’ 기념식 연설에서 “우리는 일본의 수출 규제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역의 힘으로 선진국이 됐다”면서 “이런 소중한 성과마저 오로지 부정하고 비하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자부심과 희망을 무너뜨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언론은 대통령이 ‘작심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주어는 생략했지만 누가 보아도 자화자찬성 발언이었다. 한 신문 사설은 이에 대해 “기업인들이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이지 정부가 보태준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각종 반기업 정책을 쏟아내면서 기업을 옥죄어 온 정부가 그렇게 말할 자격은 없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주 52시간 근무제 일괄 시행, 친노조 편향의 노동 3법 개정 등 수많은 규제로 기업들을 위축시켰는데도 기업들이 이룬 성과에는 열심히 숟가락을 얹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바로 ‘기업 뒤 세우기’를 비판한 것이다. 이 사설은 나아가 이 정부의 ‘기업 앞세우기’도 비판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마스크 대란과 백신 확보 실패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기업들에 손을 벌렸기 때문이다. 사실 손을 벌렸다는 표현보다는 기업들을 앞세워 일을 해결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정권 내내 적폐청산의 프레임으로 곤경에 처한 대기업도 정작 급할 때는 정부의 구조 신호(SOS) 요청 대상에서 빠진 적이 없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제회의에서 약속한 주요 국정 어젠다에서도 기업들이 앞세워진다. 

문 대통령은 또 지난해 12월 탄소중립 선언 1주년을 맞아 “탄소중립 선언은 정부가 했지만 탄소중립 시대를 열어가는 주역은 기업”이라고 선언했다. 2021년 연말쯤에는 6대 기업 총수를 초대해 모임을 하며 “6대 기업은 앞으로 3년간 청년 일자리 18만여 개를 창출하고, 교육훈련과 창업을 지원하겠다”라는 약속을 했다. 그러면서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몫이고 정부는 최대한 지원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집권 초 정부의 입장과는 정반대 목소리다. 문 정부는 집권 초기 각 부처를 대상으로 ‘일자리는 민간과 시장에 맡겨야 한다’라는 식의 고정관념이 아직도 부처 내에 남아 있다”라고 비판했다.

필자는 현 정부의 일자리 창출 성적이 합격점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 임기 말이라도 기업을 앞세우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기업을 뒤 세우기나 앞세우기의 대상이 아니라 국정 파트너로 존중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무역의 날’ 축사에서 행한 발언이 다시 와닿는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해외에서 우리 기업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기업의 성공이 대한민국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기업의 투자 의욕을 살리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겠다”라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