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요정’으로 불린 술, 압생트. 셔터스톡
‘녹색 요정’으로 불린 술, 압생트. 사진 셔터스톡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압생트는 빈센트 반 고흐가 마시고 귀를 잘랐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술이다. 이 술은 19세기 중반 유럽 예술가의 일상에 늘 함께했다. 고흐, 드가, 툴루즈, 피카소 등 여러 화가의 그림에 직접 등장할 뿐 아니라 오스카 와일드, 보들레르, 심지어 대서양 건너편 어니스트 헤밍웨이, 에드거 앨런 포 등 문인에게도 사랑받았다.

스위스에서 처음 만든 압생트는 증류주에 아니스, 회향, 쑥 등 허브를 첨가해 다시 증류하는 방식으로 제조돼 녹색을 띤다. 이에 ‘녹색 요정’이라고도 불린 이 술은 물에 섞으면 뿌옇게 변하고 빛을 한참 받으면 산화돼 갈색으로 변한다. 은은한 단맛과 쑥의 쓴맛이 함께 나 설탕을 타 마시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압생트는 대중의 사랑도 받았다. 값이 저렴하고 알코올 함량이 높다는 특성 덕분이다. 알코올 도수가 45~74도로, 빨리 취할 수 있고 물에 희석해 여러 잔을 만들 수 있어 요즘 말로 가성비가 좋았다.

그러나 압생트를 유행시킨 실질적인 배경에는 당시 유럽의 농업 재해가 있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포도 흑사병’으로 불리는 필록세라 사건이다. 필록세라는 포도나무 뿌리에 주로 기생하는 벌레다. 미국 포도나무에서 번식하던 이 벌레가 유럽에 유입된 것은 1840년쯤이다. 미국 포도나무와 달리 이 벌레에 대한 저항력이 없던 유럽 포도나무는 이때부터 40여 년간 초토화되기에 이른다. 포도나무가 죽어 나가도 성충의 크기가 1㎜ 정도에 불과해 농부들은 한참 동안 필록세라가 원인인 줄도 몰랐다. 이유를 알고서도 1876년에 와서야 이 벌레에 강한 미국 포도나무에 유럽 포도나무를 접붙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와인 생산에 의존하던 수많은 유럽 농민이 살길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거나 해외 이민을 택했다. 수십 년간 포도가 자라지 못하자 와인은 찾아보기조차 힘들게 됐고 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일반 시민의 식탁에서는 더 이상 와인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때 와인을 대체할 술로 등장한 게 압생트였다.

그러나 술 가격을 더 낮추거나 색을 더 극적으로 바꾸기 위해 여러 다른 재료를 첨가하는 제조자들 때문에 압생트는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불량한 성분과 높은 알코올 도수 때문에 이 술을 마시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압생트가 환각 작용이나 정신착란을 유발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녹색 악마’로까지 불렸다. 결국 1910년 스위스가 판매 금지 조치를 취한 데 이어 프랑스, 미국 등에서 금지 조치가 이어졌다. 90년 넘게 유지된 판매 금지 조치는 2005년에 와서야 풀렸다. 높은 도수의 술을 과다하게 마신 것이 원인으로 밝혀지며 재료에 대한 규정과 함께 스위스에서 제조가 다시 허용됐고,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도 이뤄져 지금은 세계적으로 다시 생산과 판매가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유행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압생트를 대체할 수 있는 주류가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 밥상 물가(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가격)가 지나치게 빨리 오르고 있다. 지난 5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5.4% 상승했다. 11년 5개월 만의 최고치다. 식품 물가 상승률은 이보다 높은 6.02%를 기록했다. 정부는 식품류의 수입 관세를 낮춰 밥상 물가를 잡겠다는 대책을 발표했지만, 공급 자체가 감소하고 있어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 두고 봐야 할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촉발된 농산물 가격 급등 이후 주요 수출국들이 자국 우선 정책을 이유로 수출 제한에 나섰기 때문이다. 식품 가격 상승을 의미하는 애그플레이션이 나라마다 물가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농산물은 공급 유연성이 낮아 문제가 발생하면 적어도 수개월 이상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그저 압생트의 시대가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윤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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