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중앙은행의 디지털 화폐(CBDC)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CBDC는 중앙은행이 일반 국민에게 계좌를 제공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화폐다. 11월 3일 발간된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5월 기준 105개국에서 CBDC를 고려하고 있고, 바하마, 자메이카, 나이지리아 등 10개국이 이미 CBDC를 법정화폐로 도입했다. 중국은 CBDC 도입에 가장 앞장선 국가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에 따르면, 디지털 위안화는 올해 8월 말 기준 15개 시범 실시 지역에서 거래량 3억6000만 건을 기록했고, 거래액은 19조원을 넘겼다. 알리페이와 위챗페이도 디지털 위안화를 지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된 러시아도 CBDC 본격 도입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내년 초 CBDC 디지털 루블화를 발행하고, 중국과 상호 결제 통화로 사용할 계획이다. 다만 현지 내수 사용은 2025년 시행될 전망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도 CBDC 관련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9월 16일(이하 현지시각) 백악관이 발표한 ‘디지털 자산의 책임 있는 발전을 위한 포괄적 프레임워크’ 보고서를 통해 CBDC 추진 가능성을 내비쳤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해 10월 디지털 유로화 관련 연구를 시작해 올해 9월 민관이 협력해 개발한 디지털 유로화 첫 프로토타입을 승인했다. 최종 도입 여부는 내년에 결정할 전망이다. 디지털 화폐 경쟁은 미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지정학적 기술 경쟁 양상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CBDC 도입에 적극적인 것은 위안화 가치를 높이고 달러 패권을 이용한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란 게 중론이다. 그러나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CBDC의 국가 간 거래를 위한 합의가 어렵다는 점, 기술적 안정성 검증 미흡, 개인 금융 거래 정보 보호 문제, 민간은행 역할 위축 등은 CBDC의 한계로 지적된다. 필자 역시 CBDC 도입을 고려하는 중앙은행은 디지털 화폐, 거래의 기밀성, 금융 안정성 중 두 가지만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회의적 입장을 표했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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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아이켄그린캘리포니아대버클리캠퍼스 교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 IMF 수석정책 자문위원
배리 아이켄그린캘리포니아대버클리캠퍼스 교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전 IMF 수석정책 자문위원

전 세계 중앙은행은 자체 디지털 화폐 발행을 꾸준히 고려해왔다. 중국 인민은행은 2020년 선전에서 디지털 위안화 시범 운영을 시작했으며 이후 실시 지역을 확대 중이다. 스웨덴 중앙은행도 상업 및 소매 지불을 위해 디지털 화폐 ‘e-크로나(e-krona)’ 실험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최근 CBDC의 찬반을 가늠하는 보고서를 냈다.

중앙은행들은 CBDC 열차가 떠나기 전 서둘러 탑승하고 있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불러왔을까. 한 가지는 CBDC가 더 많은 대중이 결제나 은행 거래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를 보면 CBDC보다 직접적인 해결 방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는 시중 은행이 최소 잔고 요건 없는 단순한 저축 계좌를 제공하도록 해 ‘은행 계좌 없는’ 금융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특히 은행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시골 주민이 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지난해 기준 약 4억 개의 국민 계좌가 개설됐다.

인도 정부는 효율적이고 저렴한 전자 결제 인프라 ① 디지털 국가지불시스템(UPI)도 만들었다. UPI는 정부가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인 내셔널 페이먼트 코퍼레이션(National Payments Corporation)이 운용하는 실시간 결제 시스템이다. 또 은행, 전자 화폐 기업, IT 기업들은 사용자가 은행 계좌 간 송금할 수 있는 UPI 지원 모바일 결제 앱을 선보였다.

약 300개 은행이 이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지만, 인도 정부는 CBDC 도입에 조바심을 내고 있다. 아마도 정책 입안자들이 CBDC를 도입하는 것이 IT 부문 발전에 도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금융 서비스 보편화와 결제 용이성 차원에서 CBDC 도입은 기존 인도 금융 인프라와 역할이 겹친다.

현 금융 시스템에서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해외 송금은 비용이 많이 들고 절차도 복잡하다. 게다가 미국의 금융 제재를 목도한 각국 정부는 해외 송금 과정에서 달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불편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CBDC가 대안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CBDC의 경우 다른 나라의 CBDC와 교환하고 해외 결제를 진행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여러 CBDC가 단일 블록체인에서 실행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중앙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과 협력해 CBDC 시범 사업 ② 엠브리지(mBridge)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적 노하우를 갖췄다고 해도 CBDC 관련 협정이 광범위하게 채택되기에는 만만치 않은 정치적 장애물이 있다. 일례로 중국과 미국이 CBDC로 거래하는 플랫폼을 관리하는 방법에 합의할 수 있을까. 이들 이외에 전 세계 120개 중앙은행이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CBDC 도입이 빨라지는 또 다른 이유는 이를 가장 먼저 성공한 중앙은행, 즉 해당 국가가 새로운 경제 질서를 선점해 새로운 금융 및 지정학적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라는 섣부른 믿음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미국과 중국의 경제·정치적 긴장과 달러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중국의 CBDC 발행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더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CBDC가 국경을 넘어 사용되고, 국제 거래 결제 수단으로서 국제 은행 간 시장을 대체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국 CBDC의 공통 거래 플랫폼을 만들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전제는 실현될 가능성이 작다.

결국 CBDC 발행을 고려하는 중앙은행은 ‘트릴레마(Trilemma·세 가지 딜레마)’에 직면한다. 그들은 CBDC, 거래의 기밀성, 금융 안정성 등 세 가지 중 두 가지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중앙은행들은 CBDC를 발행할 때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데이터 개인 정보 보호법인 EU 일반 데이터 보호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중앙은행이 공인된 중개 기관을 통해 CBDC를 발행하면 사용자의 기밀성이 지켜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당국이 CBDC 거래를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된다.

중앙은행은 물론, 업계 관계자들은 CBDC를 도입할 경우 시중 은행을 사용하는 거래가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 CBDC 거래의 기밀성으로 인해 금융 리스크와 불균형이 규제 기관의 눈에 띄지 않게 쌓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유럽중앙은행이 CBDC 발행에 조심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외환 경제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국제 금융은 이미 트릴레마로 가득 차 있다. CBDC는 해결책이 되는 대신 또 하나의 딜레마가 될 것이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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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I(United Payments Interface)는 핀테크 기업과 공공기관 간 정보 교환이 가능하게 해 은행 및 개인 간 자금 거래가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한 결제 시스템이다. 2016년 인도 금융결제원(NPCI)이 도입했다. 


엠브리지는 국제결제은행(CBIS)과 홍콩, 태국, 중국, 아랍에미리트 중앙은행이 함께 실시한 국경 간 디지털 화폐 지불 실험이다. 실험은 8월 15일부터 9월 23일까지 6주간에 걸쳐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를 사용해 기업 고객의 결제 및 외환 거래를 대신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실험 기간중 총 160회 자금이 국경을 넘어 이체됐고, 규모는 2200만달러(약 290억원)에 달했다. 실험에 참여한 각국 중앙은행은 2023년과 2024년에도 엠브리지 프로젝트를 계속할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