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의 안드레아 일리 회장. 사진 일리
일리의 안드레아 일리 회장. 사진 일리

‘롤스로이스 커피’ ‘커피계의 아르마니’. 커피 애호가에게 최고급 커피로 꼽히는 일리(illy)가 기업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리는 그간 남다른 커피 철학을 지키기 위해 100% 가족 경영을 고수해왔지만, 2016년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했다. 올해는 소비자와 접점을 확대하기 위해 외부 투자자의 투자를 받기로 했다.

일리는 약 90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1위 커피 브랜드다. 프란체스코 일리는 1933년 이탈리아 북부 항구 도시 트리스테에서 ‘일리카페(illycaffe)’를 설립했다. 그는 최초로 현대식 에스프레소 기계 ‘일레타’를 발명하고, 캔에 공기 대신 질소를 채워 매장에 균일한 제품을 내보내는 포장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들인 에르네스토 일리와 손자 안드레아 일리가 회사를 이어받아 가족 경영을 유지해왔으며, 4세 경영을 준비 중이다.

일리는 그간 기업의 소유권이 외부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 중 누군가가 소유 지분을 매각할 경우 가족 전체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해왔다. 기업공개(IPO)를 하지 않고, JAB·네슬레 등 쟁쟁한 경쟁자의 인수·합병 제안도 거부해왔다. 그러던 일리가 네슬레 출신 외부 CEO를 영입하고, 외부 투자자와 손을 잡았다. 일리가 변화를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코노미조선’이 일리의 변화를 세 가지 포인트로 짚어봤다.


포인트 1│소비자 접점 늘린다

일리는 이탈리아 내 시장 점유율 1위 카페로, 현재 전 세계 40개국에 약 269개의 브랜드 매장을 운영 중인 글로벌 커피 프랜차이즈다. 카페·레스토랑·호텔·가정에서 매일 800만 잔 이상의 커피가 소비된다.

일리는 그간 고급 브랜드 마케팅으로 이름을 알려왔다. 창업주이자 화학자인 프란체스코 일리는 커피 맛과 향에 집중하며 제품 차별화 정책에 앞장섰다. 커피콩(원두)과 보관 방식, 커피 기계 개발에도 집중했다. 2대인 에르네스토 일리 전 회장도 화학을 전공한 뒤 사내 향기전문연구소(아로마랩)를 설립해 맛과 향을 연구하는 데 힘썼고, 대학 기관과 협력해 커피 전문가를 양성했다.

고급 브랜드 마케팅에 박차를 가한 건 안드레아 일리 현 회장이다. 그는 1993년 취임 당시 해외 진출 정책을 수립하며 뉴욕과 런던, 파리의 특급 레스토랑과 유명 카페 바를 타깃으로 삼았다. 뉴욕의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 르시르크, 파리의 르그랑베푸르 등 최고급 식당에 후식용 커피를 공급했고, 점차 다른 레스토랑의 러브콜을 받게 됐다. 다른 커피보다 두 배가량 높은 가격에도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었다.

명품 커피 브랜드로 이름을 알렸던 일리는 수년 전부터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에 힘을 쏟고 있다. 일리는 2018년 JAB와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전 세계 슈퍼마켓에서 캡슐 커피 판매에 나섰고, 웹사이트를 통한 커피 구독 서비스도 출시했다. 일리의 2019년 매출액은 전년 대비 6.6% 늘어난 5억2000만유로(약 6900억원), 순이익은 5.2% 증가한 1900만유로(약 252억원)였다. 일리는 지난해 성장세가 캡슐 커피 판매 덕분이라고 본다.

일리는 올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레스토랑, 카페 이용객이 줄자 이 전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집에서 커피를 즐기는 고객이 늘자 B2C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일리에 따르면, 기존에 기업 간 거래(B2B) 비중이 60%, B2C 비중이 40%였으나, 가정 판매에 집중해 B2C 비중을 50%로 늘릴 계획이다.

마시밀리아노 포글리아니 일리 CEO는 “코로나19로 온라인 주문이 두 배 이상 늘면서 봉쇄 타격을 줄였다”며 “온라인 주문 고객의 절반은 신규 고객으로, 유입된 고객은 계속해서 일리를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리는 생두가 도착했을 때부터 밀봉될 때까지 총 125번의 품질 확인 작업을 진행한다. 사진 일리
일리는 생두가 도착했을 때부터 밀봉될 때까지 총 125번의 품질 확인 작업을 진행한다. 사진 일리

포인트 2│소유·경영 분리하고 투자 유치

가족 경영으로 유명한 일리는 최근 들어 외부로 문호를 열고 있다. 일리는 2016년 포글리아니를 CEO로 선임했다. 그는 세코·가치아·네스프레소·네슬레 등 커피 업계에서 20년간 마케팅·소매 경험을 쌓은 인물이자, 일리가 처음으로 외부에서 영입한 CEO다.

일리는 이사회 구성원도 대부분 외부 인사로 채워 넣으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리의 이사회 10명 중 7명은 가족 구성원이 아니며, 이 중 5명은 독립이사로 꼽힌다. 27년간 TGI 등 여러 금융회사에서 CEO로 재직한 엔리코 토마소 쿠치아니가 부의장을 맡았고, 로베르토 에그스 몽클레어 최고마케팅책임자(CMO), 크리스티나 스코치아 키코 CEO도 이사회 구성원으로 포함됐다.

경쟁자들의 인수·합병을 거부한 일리는 지난해부터는 브랜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시장 확대를 고려해 투자받기 위해 재무적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일리는 11월 21일 “1년 이상 검토한 결과, 글로벌 사모펀드인 ‘론 캐피털(Rhone Capital)’에 지분 일부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일리와 론 캐피털의 거래는 내년 1분기 말에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리는 2024년까지 미국에서 200여 개의 매장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안드레아 일리 회장은 “론 캐피털은 그간 가족 경영 기업들과 함께한 경험이 있는 데다 뛰어난 품질, 오랜 유산, 지속 가능한 모델을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해 함께하게 됐다”며 “론 캐피털이 우리의 빠른 성장을 이끌길 바란다”고 말했다.


포인트 3│가문 철학을 지키는 명품 커피

일리는 다양한 변화에도 ‘고급 커피를 제공하겠다’는 가문의 철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일리는 다른 커피 브랜드보다 약 30~50%가량 비싼 원두를 사용하고, 원두를 하나하나 검수하는 데 공을 들인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두 수는 약 50개. 그중 단 하나라도 질이 나쁘면 향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다.

일리는 원두가 생산 라인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밀봉 상태의 제품으로 나올 때까지 총 125번의 품질 확인 작업을 진행한다. 카페인 함량을 측정하기 위해 스펙트럼 광도 측정법과 자외선 및 후각 분석 과정을 활용하고, 원두를 볶은 후에는 농약과 중금속 성분 여부를 확인하는 화학 테스트를 한다.

안드레아 일리 회장은 그의 저서 ‘커피: 더 드림(Coffee:The Dream)’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공유했던 꿈은 내 꿈이 됐다”며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는 것은 원두가 자라고 수확되는 장소, 영화, 예술, 디자이너 컵, 대화 등 많은 아이디어를 포함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