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전제품 총판점인 빅카메라는 최근 가상화폐 거래소인 비트플라이어를 통해 비트코인으로 물건 값을 계산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사진 : AFP>
일본 가전제품 총판점인 빅카메라는 최근 가상화폐 거래소인 비트플라이어를 통해 비트코인으로 물건 값을 계산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사진 : AFP>

세계 외환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하던 ‘와타나베 부인’이 가상화폐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와타나베 부인이란 장기 저(低)금리인 일본에서 돈을 빌려 수익률이 높은 해외에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본에서 흔한 성(姓)인 와타나베에, 가구소득을 관리하는 가정주부들이 주요 투자자라는 점에서 부인을 붙인 것이다.

와타나베 부인은 가상화폐 시장에 진출하자마자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상화폐 투자정보업체 크립토컴페어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 비트코인 투자 중 엔화 거래가 전체의 62%에 달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코인 ‘광풍’이 불고있는 우리나라 원화의 경우 9%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정도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다.

일본 정부는 가상화폐를 결제수단으로 공식 인정하는 등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며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고, 수수료 경쟁으로 수익모델 다각화가 절실했던 일본 온라인 증권사들도 가상화폐 사업에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세계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향후 가상화폐 시장을 선도할 국가’ 1위로 일본을 꼽은 것(블록체인 플랫폼 우에부스 조사)은 와타나베 부인과 기업의 공격적 투자, 일본 정부의 적극적 대응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세계 FX 거래량 54%는 와타나베 부인

지금까지 와타나베 부인의 주종목은 FX 마진거래였다. FX 마진거래란 증권사에 일정 금액의 증거금(보증금)을 맡기고 통화를 거래하는 외환 투자 방식이다. 달러나 파운드 등 8개국 통화 변동에 투자해 환차익 등을 얻는 것인데, 증거금의 수십 배까지 투자할 수 있어 투기성이 짙다. 일본 금융선물거래업협회에 따르면, 일본의 연간 FX 거래량은 2011년 1737조엔에서 2015년 5532조엔으로 급증했다. 도이체방크는 “일본이 세계 FX 거래량의 54%를 차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와타나베 부인이 FX 거래에서 손을 떼는 모양새다. FX 거래에 크게 데었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와타나베 부인은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등 예측에 실패하면서 손해를 봤다. 환율이 큰 폭으로 움직여야 이에 따른 차익도 커지는데, 지난해엔  환율변동성까지 낮아져 큰 이익을 보기 어려웠다. 사사키 토루 JP모건체이스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달러-엔 환율의 변동폭은 10% 이하였는데, 이는 1980년 이후 불과 세 번 나타났던 드문 수준”이라고 했다.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일본 전체 FX 계좌 중 2015년 1분기부터 지난해 2분기까지 10개 분기 동안 수익을 올린 계좌가 더 많았던 때는 6번이었다. 손실을 입은 계좌가 더 많았던 때는 4번이었지만, 10분기 전체 평균은 손실을 입은 계좌가 57%, 수익을 올린 계좌가 43%였다. 즉 전체적으로는 손실을 입은 투자자가 더 많다는 뜻이다. 이후 일본 FX 거래량은 급감했다. 2016년 4949조엔으로 고꾸라진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11월 기준 3144조엔까지 떨어졌다. 와타나베 부인 중 84.3%는 ‘FX 거래를 계속 할 것인가’라는 금융선물거래업협회의 물음에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비트코인 ATM으로 비트코인을 사고 있는 일본인. <사진 : 블룸버그>
비트코인 ATM으로 비트코인을 사고 있는 일본인. <사진 : 블룸버그>

와타나베 부인, 비트코인 거래량 60% 차지

도이체방크는 “개인 투자자들이 FX 거래에서 가상화폐 거래로 옮겨가고 있다”고 했다. 그 증거로는 가상화폐 시장에서 엔화 거래 비중이 갈수록 증가하는 점을 꼽았다. 가상화폐 투자정보업체들은 세계 비트코인 월간 거래량 중 엔화 비율이 적게는 40%, 많게는 60% 이상을 상회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비트코인 정보 사이트 JP비트코인닷컴에 따르면, 일본의 월간 비트코인 거래액은 지난해 8월 7867억엔에서 11월 3조9927억엔으로 크게 늘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하자 개인 투자자들이 외환에서 비트코인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일본의 비트코인 거래자는 100만명이 넘는다”고 했다.

와타나베 부인을 따라 일본 온라인 증권사도 가상화폐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온라인 증권사는 1990년대 일본에 등장하기 시작, 파격적인 수수료를 무기로 시장을 독점해왔다. 오프라인 중심의 기존 증권사들과 달리 인프라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어 낮은 수수료가 가능했다. 그러나 다수의 온라인 증권사가 들어서는 바람에 수수료 출혈 경쟁이 발생해 수년 전부터 사업모델 다각화 필요성이 제기됐다. 일본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온라인 증권사의 가상화폐 시장 진출에 대해 “수수료 마진이 줄어든 상황에서 눈앞에 펼쳐진 기회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때맞춰 일본 정부가 가상화폐를 법적 거래 수단으로 인정하고, 가상화폐 거래소 면허 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들 사업 진출에 발판이 됐다. FX 거래 규제가 강화된다는 소문도 가상화폐 시장으로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현재 증거금의 25배까지 투자할 수 있지만, 일본 금융청은 이를 10배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형기 금융투자협회 국제조사역은  “온라인 증권사들이 가상화폐 사업을 서두르는 데엔 FX 규제 강화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최대 온라인 증권사인 SBI증권을 운영하는 SBI그룹은 중국 후오비와 손잡고 일본에 가상화폐 거래소를 설립할 예정이다. 후오비는 한때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였지만, 중국 정부가 가상화폐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실시하자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나아가 SBI그룹은 세계 가상화폐 시장에서 힘을 키우기 위해 비트코인 채굴에까지 뛰어든다. SBI스크립트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전기료가 싼 해외에서 채굴 작업을 시작한다고 지난 8월 발표한 것이다. 이외에 마넥스증권을 운영하는 마넥스그룹도 가상화폐 거래소 등록을 준비 중이고, 카부닷컴증권, 마쓰이증권 등도 관련 사업 진출을 검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