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영국 런던 크리스티 본사에서 열린 리먼브라더스 소장 미술품 경매 행사 모습. 비슷한 시기에 열린 뉴욕 소더비 경매까지 합쳐 총 1453만달러(약 163억원) 상당의 작품 450점이 판매됐다. 사진 블룸버그
2010년 9월 영국 런던 크리스티 본사에서 열린 리먼브라더스 소장 미술품 경매 행사 모습. 비슷한 시기에 열린 뉴욕 소더비 경매까지 합쳐 총 1453만달러(약 163억원) 상당의 작품 450점이 판매됐다. 사진 블룸버그

“미국 경제의 호황은 앞으로 2년 더 지속될 것이다. 야구 경기로 치면 지금 7회쯤 와 있다. 다음 경기 하강은 이전보다 사회·정치적으로 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만큼 파장이 크지는 않겠지만 천천히 오랫동안 가계에 부담을 줄 것이다.”

미국의 억만장자 투자자인 레이 달리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창립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미 경제 전문채널 CNBC에 출연해 한 말이다. ‘헤지펀드계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포브스’ 추정 보유 자산은 181억달러(약 20조3100억원)에 달한다. 미국 경제의 최근 흐름을 보면 이 주장이 별로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10주년을 맞은 미국 경제는 지표상으로 위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경제성장률 3.2%를 기록하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목표로 내건 연간 ‘3% 성장’ 달성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2008년 9월 6.1%였던 실업률은 지난 7월 완전 고용 수준인 3.9%로 하락했다.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도 133.4로 2000년 10월 135.8에 이어 17년 10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랐다. 소비자심리지수는 100보다 높을수록 경기와 살림살이에 대한 전망이 낙관적임을, 낮을수록 비관적임을 의미한다. 미국 증시는 8월 22일(현지시각) ‘닷컴버블’ 시절 세운 역대 최장기 ‘강세장(Bull Market)’ 기록을 경신하는 등 호황을 이어가고 있다. 금융위기 후폭풍으로 666까지 폭락했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는 네 배 넘게 상승했다.

하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경기 회복의 ‘질적’ 측면에서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계 부채의 내용만 달라졌을 뿐 미국 중산층이 위기에 속수무책인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가계 부채, 금융위기 수준 넘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3분기 미국의 가계 부채는 12조7000만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몇 년간 감소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13조3000만달러로 불었다. 물가 변동을 반영하지 않은 단순 비교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가계 부채 증가 속도가 우려할 만한 수준임은 분명해 보인다. 위기 학습효과로 주택담보대출은 줄었지만, 학자금과 자동차 구매 관련 대출(오토론)이 크게 늘었다.

미국에서 학자금 관련 부채를 떠안고 있는 사람이 4400만 명에 달한다. 학자금 대출 총액이 얼마 전 1조5000만달러(약 1122조원)를 넘어섰으니 1인당 평균 4만달러(약 45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자동차 구매 관련 대출은 2008년 이후 53%가 증가해 1조2000억달러에 달한다. 단순한 부채 증가보다 신용이 좋지 않은 채무자가 늘었다는 것이 큰 문제다. 그로 인한 파산도 증가 추세다. 미국에서 차량 구매 할부금은 납부 우선순위 1~2위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차 없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동차 할부 관련 파산이 증가한다는 것은 빚 갚을 능력을 상실한 미국인이 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경제에 위험신호라고 할 수 있다.

학자금 대출의 경우 채권자가 금융기관이 아닌 연방정부인 경우가 많아 위기가 오더라도 금융권의 재정 건전성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 해도 채무 상환을 위해 다달이 내야 할 금액이 늘어나면 소비심리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핀테크를 비롯한 온라인∙모바일 금융 관련 부채도 급증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핀테크 P2P(개인 대 개인) 대출 업체인 렌딩클럽의 2007년 대출 규모는 2500만달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38억달러에 달한다.

그런데도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을 따라가기 벅찬 상황이어서 중산층 이하 가계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미국 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12개월 동안의 실질 임금 상승률(물가 상승 반영)은 약 0.1%에 불과했다. 7월 기준 시간당 임금은 약 0.2% 감소했다. 이에 반해 지난 7월까지 1년간 주택 임대 비용 상승률은 3.5%에 달했다.

정말 큰 문제는 미국인의 상당수가 은퇴 이후 생활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연준의 지난해 가계금융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 성인의 4분의 1은 노후 생활에 대비한 저축액이 한 푼도 없었다. 응답자의 약 40%는 400달러 정도인 응급 서비스 비용도 감당할 여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경제의 호황을 법인세 감세 효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지난해 말 35%이던 법인세율을 21%로 낮춘 미국은 조만간 세율을 20%로 낮추는 추가 감세 법안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처럼 중국과 무역전쟁을 지속한다면 감세 효과 지속을 장담하기 어렵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IHS마킷은 최근 보고서에서 “무역전쟁으로 법인세 감세 효과가 점차 줄고 있으며, 이런 흐름이 지속된다면 대규모 세제 개편 효과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보복 관세로 수입품 가격이 오르면 소비심리가 꺾일 수밖에 없다. 달러화 강세로 어느 정도 상쇄되겠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소비가 줄면 기업 투자도 영향을 받게 된다. 강달러가 지속되면 달러 부채 상환 부담이 커지면서 신흥국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흥국발 금융불안이 또 다른 글로벌 금융위기의 뇌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터키의 경우 달러화 대비 리라화 가치가 올해 들어서만 40% 추락한 가운데 달러 부채가 만기 돼 상환 불능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금리 인상에 미국의 제재로 인한 수출 타격이 겹치면서 터키 기업의 부채 상환 비용이 급증했다. 올 초 10만달러를 상환하는 데 37만9000리라가 들었다면 이제는 66만리라를 갚아야 한다. 이런 상황이 브라질과 남아공,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되풀이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이 같은 사태는 위기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리먼브러더스 사태 10주년을 맞은 연설에서 “금융위기는 아주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아직 사라질 기미가 없다”며 “불평등과 보호주의 무역 등의 도전 과제에 각국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면 우리가 과연 리먼 사태의 교훈을 제대로 학습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