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에서 열린 현대차 주주총회에서 한 주주가 발언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임박하면서 기관 투자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기업의 의사 결정에 참여할 전망이다. 사진 블룸버그
올해 3월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에서 열린 현대차 주주총회에서 한 주주가 발언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임박하면서 기관 투자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기업의 의사 결정에 참여할 전망이다. 사진 블룸버그

국민연금이 7월 말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도입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 자산운용사 등 기관 투자자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로서 투자한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내용을 담은 행동 지침을 뜻한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핵심 정책 중 하나다. 

국민연금은 전체 기금 634조6000억원, 이 중 국내 주식만 134조6000억원(2018년 4월 말 기준)을 굴리는 ‘자본시장의 큰손’이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본격적으로 도입할 경우 현재 50여 곳에 그치고 있는 기관 투자자들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다른 연기금들도 국민연금 모델을 참고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할 수 있다. 다만 ‘자본시장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자리를 두고 청와대의 인사 개입 논란이 있었던 만큼 기금 운용의 자율성과 독립적 의사 결정이 보장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자본시장 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실행 방안을 담은 초안은 현재 배당 확대에 국한된 주주 활동을 다양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는 다른 회사를 부당한 방법으로 지원하는 행위, 특수 관계인에게 부당 이익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경영진 일가가 사익을 편취하는 행위, 횡령·배임, 과도한 임원 보수 한도, 지속적인 반대 의결권 행사에도 개선 없는 경우 등이 포함됐다. 국민연금은 이런 내용을 이른바 ‘중점 관리 사안’으로 관리하면서 해당 투자 기업에 경영진 면담과 관련 대책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기업 조치 사항을 확인할 예정이다. 공개·비공개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방침이다.

초안은 또 국민연금의 투자 자산 일부를 굴리는 자산운용사에 국민연금의 해당 의결권을 넘기는 방안이 담길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일본의 국민연금인 공적연금(GPIF)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GPIF는 국내 주식 투자를 전부 펀드 방식으로 아웃소싱하고 있다. 펀드 내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는 위탁을 맡은 자산운용사가, 운용사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에 관한 모니터링은 GPIF가 각각 맡는 구조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중 절반은 직접, 나머지 절반은 민간 자산운용사에 위탁하고 있는데 자본시장법에 따라 위탁 자산의 의결권은 명의자인 국민연금이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당 안이 실제 시행되려면 법 개정이 필요하다.

국민연금은 당초 재계가 경영권 간섭 우려를 제기했던 주주 제안을 통한 사외이사(감사) 후보 추천이나 국민연금 의사 관철을 위한 의결권 위임장 대결 등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활동을 주주권 행사 범위에서 제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은 7월 17일 이 같은 스튜어드십 코드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담은 초안을 공개하고 공청회를 열어 이해 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한다. 국민연금을 관리 감독하는 보건복지부는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26일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도입안을 심의, 의결하고 본격 실행에 들어가게 된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본격 도입되면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 국내 기업 300여 곳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갈 전망이다.

국민연금은 올해 1분기(1~3월) 투자 기업 주주총회에 총 625회 참석해 2561건에 관해 의결권을 행사했다. 이 중 반대가 무려 20.5%에 달했다. 지난 5년간 국민연금의 반대 의결권 행사 비율이 10% 안팎에 그쳤던 점을 고려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자본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본격 시행에 앞서 일종의 예행연습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 6월 경영진 일가의 일탈 행위에 대한 사실 관계 및 해결 방안을 묻는 공개서한을 대한항공 측에 발송해 적극적인 주주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스튜어드십 센터장은 “국민연금은 초장기 투자자로 운용 자산이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는 데 쓰이는 만큼 이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정부의 입김이 반영될 것이란 우려 때문에 주식 매매만 하는 것은 오히려 자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익보다 사회적 책임 강요 우려도

그러나 국민연금이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 고용 보장이나 사회적 책임같이 기업의 중·장기적인 수익 극대화에 배치되는 의사 결정을 기업에 강요할 수 있게 된다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은 여전하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한 예로 정부가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근로자 추천 이사제(이른바 노동이사제) 도입을 국민연금이 지지하는 것은 연금 사회주의”라며 “연금은 정부가 아닌 가입자들의 것인 만큼 가입자들이 공통적으로 기대하는 ‘장기적-안정적 수익률’이라는 목표에 맞춰 운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보호돼야만 스튜어드십 코드가 제대로 구현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독립적으로 기금 운용이 이뤄지는 외국 연기금과 달리 우리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임명한다. 이사장 아래에 실제 기금 운용을 담당하는 기금운용본부가 있다. 기금 운용이 정부 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정부 정책을 따르지 않거나 여론이 좋지 않은 기업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재계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이런 우려를 의식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직속 독립 의사 결정 기구인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이하 의결권행사위)를 확대 개편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2006년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해 정부, 가입자 단체, 학계 등이 추천하는 8인으로 구성해 만든 의결권행사위를 만들었으나, 그해 딱 한 번만 회의가 열리는 등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말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한 연구’ 용역 과제를 수행한 고려대 산학협력단은 보고서에서 의결권행사위의 독립성과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