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토종으로 남아 있는 우리은행이 최근 ‘민영화 딜레마’에 빠졌다. 정부가 우리금융 지분 매각을 2년간 연기하면서 토종 은행으로서 지위를 지킬 수 있게 됐지만 은행 성장의 족쇄인 예금보험공사와의 MOU(경영이행각서)도 자연스럽게 2년간 유지됐기 때문이다.

 우리은행 내부에서는 “한국씨티은행, SCB 등 세계적 은행들과 ‘금융대전’을 준비해야 하는 판에 민영화 연기가 오히려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다”는 불만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황영기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의 구조 개선 노력이 노사간 반목으로 공전하면서 시장에서는 ‘민영화 연기가 과연 효과를 얻을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MOU가 경쟁의 걸림돌’ 지적도

 지난 2004년 12월 29일, 정쟁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현안에는 무관심했던 국회가 55개 법안을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에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도 포함됐다. 이 개정안의 골자는 정부가 금융지주회사의 지배 주주가 될 경우 그 보유 주식의 처분을 기존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개정안은 우리금융지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금융의 80.2% 지분을 보유한 정부는 관련법에 따라 당초 올 3월까지 보유 지분을 매각해야 했다. 정부가 우리금융에 투입한 약 8조원의 공적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주당 1만7000원에 매각해야 했지만 우리금융의 주가는 8000원대를 넘어서지 못해 계획대로 지분을 매각할 경우 공적 자금 절반을 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법 개정을 통해 우리금융 민영화를 2년간 연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최근 강하게 불고 있는 외국계 바람도 우리금융 민영화 연기에 한몫(?)했다. 씨티은행, SCB, HSBC 등이 잇따라 국내 은행을 인수 또는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면서 유일한 토종 은행인 우리은행의 매각을 연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던 것이다. 당시 황 행장도 “정부 지분을 해외 펀드에 매각하느니 국내 산업자본에 넘기는 것이 차라리 낫다”며 정부 보유 주식 매각을 강하게 반대했다.

 정부의 공적 자금 회수 최대화와 토종 은행 육성이라는 대의명분이 우리금융 민영화 연기로 이어졌지만 우리금융의 자회사인 우리은행은 이를 반기기보다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정부의 민영화 연기로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와의 MOU(경영이행각서)가 2년간 연장되면서 또 다시 극히 보수적인 경영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 씨티뱅크 등 세계적 은행들과 금융대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 MOU가 경쟁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우리은행의 한 실무담당자는 “정부가 토종 은행 육성 차원에서 관련법을 개정, 민영화를 연기하면서 예보와의 MOU도 2년간 유지됐다”며 “약정상 예보가 1대 주주 자격을 상실할 때까지 MOU는 이어진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이 예보와 맺은 MOU는 크게 총자산 이익률, 판매 관리 비용률, 1인당 영업 이익, 고정 이하 여신 비율, 순고정 이하 여신 비율, BIS 기준 자기 자본 비율 6가지로 구분된다. 예보는 MOU를 통해 각 재무 부문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분기별로 점검, 기준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구조 조정 등을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은행은 MOU 지표 달성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문제는 MOU로 인해 외국 은행과 경쟁을 위한 신규 사업 진출 등 공격 경영은 물론 신입 직원마저 함부로 뽑지 못하는 것. 실제로 우리은행과 별도로 예보와 MOU를 맺고 있는 우리금융지주도 지난해 카드 부문 적자로 MOU 기준을 달성하지 못해 임금 인상, 신입사원 모집 등을 진행하지 못했다.

 이에 우리은행 신하섭 노조 부위원장은 “정부는 짧게만 볼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민영화 연기 효과를 최대한 얻어내기 위해 MOU에 대한 개정 조치도 취해야 했다”며 “현재 맺은 MOU는 경영진의 자율성을 떨어뜨려 ‘중간만 하면 된다’는 우유부단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황행장 구조개선 노력 공전

 정부의 민영화 연기가 결정되면서 황 행장에 대한 노조의 불만은 더욱 커지고 있다. 황 행장이 민영화 연기가 곧 MOU 유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 노조 부위원장은 “MOU로 자율 경영이 제한되면 치열한 금융대전에서 뒤처질 수도 있다”며 “황 행장은 우리은행이 이미 경영 정상화가 된 상태로 더 이상 각론적인 MOU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선 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황 행장의 민영화 연기 주장에 다른 의도도 포함된 것 아니냐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즉 예정대로 오는 3월 지분을 매각할 경우 ‘단명 행장’이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민영화 연기만을 주장하는 데 급급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이에 대해 우리은행은 “예보에 MOU 보완 및 개선을 요청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며 노조의 주장을 전면 반박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지주사와 은행 등이 중복으로 맺고 있는 MOU를 지주사만 맺도록 하는 등 현실에 맞게 보완 개선할 수 있도록 진행 중”이라고 해명했다. 

 이처럼 황 행장과 은행 및 여타 자회사 노조의 대립각이 커지면서 황 행장의 구조 개선 노력도 공회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 행장이 취임 이후 도입하려 했던 신인사제도.

 신인사제도란 직무와 호봉에 따라 급여가 차등 적용되는 현 인사제도를 폐지하고 직군별로 나눠 개개인의 실적을 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성과를 책정하는 제도로 말한다.

 조직 효율화와 비용 최소화로 대변되는 황 행장의 신인사제도는 취임 10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도입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 투자사업본부 등 일부 사업본부에서는 신인사제도의 일환인 성과주의를 전격 도입했지만 이마저도 노조와 직원들의 반발에 부딪쳐 시행 여부가 불분명해졌다.

 노조는 황 행장이 추진하는 성과주의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마호웅 노조위원장은 “직원 개개인의 성과 책정과 연계 업무에 대한 성과 배분 등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시스템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성과주의 제도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또 “MOU로 자율 경영조차 보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성과를 책정하고 보상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우리은행은 이미 성과주의를 위한 성과 책정 시스템 준비를 끝냈고 도입에도 무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은행은 “사실 객관적인 성과 책정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면서도 “하지만 세계 어디에도 100% 객관적인 시스템을 보유한 곳은 없고 노조의 주장대로라면 아예 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며 도입 의사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금융권 일각에서도 은행에 성과주의를 전면 도입하는 것은 아직 무리라는 견해이다. 증권사 한 대표는 “금융권에서 성과주의를 가장 먼저 도입한 증권업계조차 성과주의를 전면 개편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단순 실적 베이스로 성과를 책정하는 것은 직원들의 무리한 영업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곧 금융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증권사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황 행장의 구조 개선 노력이 차일피일 지연되고 노조와의 갈등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정부의 민영화 연기가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자칫 구조 개선 지연과 행내 갈등으로 성장 동력을 소진, 기업 가치만 더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