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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올해 상반기 내내 한국은행이 긴축적 통화정책을 숨 가쁘게 몰아침에 따라 11월 15일 기준 중앙은행 기준금리는 3.0%에 이르렀고, 급격한 유동성 위축을 우려한 시중은행들은 5%대의 정기예금 상품을 내놓게 되었다. 개인 입장에서 볼 때, 저금리 시대에는 가격 변동성이 큰 주식, 채권 등이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고금리 시대에는 안정성과 수익성을 보장하는 은행 예금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은행 예금은 크게 요구불예금(demand deposit)과 저축성예금(savings deposit)으로 나뉘고, 저축성예금은 다시 정기예금과 기타 저축성예금으로 나뉜다. 요구불예금은 말 그대로 고객이 인출을 요구하면 언제든지 은행이 그 요구에 응해야 하는 예금으로서, 은행 입장에서는 유동성 관리가 어렵고 고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측면이 크기 때문에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저축성예금은 이자를 지급하는 예금을 통칭하는 용어로서, 목돈을 일시에 적립하는 정기예금과 할부 식으로 적립하는 정기적금이 대표적이다. 상업은행의 자산 상태표를 살펴보면 부채 항목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정기예금이다. 정기예금(time deposit)은 정기, 즉 정해진 기간에는 인출할 수 없어 은행에는 안정적인 자금 조달원이 되고 예금자에게는 안정적인 목돈 마련의 역할을 한다.

 

금본위제의 산물

원래 은행 예금은 금본위제의 산물이었다. 금본위제 아래서는 국왕의 초상이 새겨진 금화나 은화가 화폐였다. 자본주의 초기 유럽에는 금과 은이 매우 귀했고, 절도나 강도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따라서 초기 은행 예금은 제이슨 본의 보관함처럼 은행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 초기 은행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골드 스미스는 사실 성채와 용병을 거느린 창고 업자로서 수수료를 받고 주화를 보관해 주는 일을 맡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대부업을 겸하고 있었지만, 대부업과 보관업은 별개의 업무였다. 자본주의 초기의 예금은 특정 임치(예, 제이슨 본의 보관함) 또는 혼장 임치(예, 농협 창고에 보관된 쌀가마니) 형태를 취했다. 주화의 소유권은 여전히 예금주에게 있기 때문에 골드 스미스가 예금된 주화를 함부로 대출에 사용하면 횡령죄로 처벌됐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은행업이 발달하면서 오늘날과 유사한 은행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예금주가 은행에 정화(금속 화폐)를 맡기면 은행은 예금주에게 영수증을 발행해주었는데, 이 영수증이 바로 은행권(bank note)이다. 오늘날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지폐에도 bank note라는 표시가 돼 있다. 초기 은행들은 예금주가 금화 인출을 요구하면 언제든지 은행권과 금화를 태환(교환)해 줬다. 즉 은행이 발행한 영수증 총액과 보관하고 있는 금화의 총액이 일치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완전지급준비제도(full-reserve banking)라고 표현하지만, 남의 소유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하는 임치(任置·deposit) 계약의 당연한 결과였다. 이 경우 은행은 주화 보관의 대가로 예금주로부터 위탁 수수료를 지급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행은 고객의 인출 요구량이 예치하고 있는 금화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든 예금주가 일시에 예금 인출을 요구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은행은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는 금화의 양보다 많은 은행권을 발행해 대출에 이용하면 초과 발행분의 이자만큼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것이 부분준비금제도의 시작이다. 은행이 은행권을 지나치게 많이 발행해서 과도하게 대출을 늘리다 보면 예금주의 의심을 받을 우려가 있다. 은행은 오랜 경험을 통해 금화와 은행권의 발행 비율이 1 대 10 정도까지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이러한 사업이 양성화하고 부분준비금제도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로비와 청탁의 역사가 필요했다.


타인의 돈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대출 수요가 늘어나게 되고, 은행이 예치된 금화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다가 돈을 떼이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예금주의 허락 없이 예치된 금화를 빌려준 은행의 행위에 분노한 예금주들이 은행을 횡령죄로 고소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판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법리적 근거 없이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판결을 내리기도 하고, 원고나 피고와의 친소관계에 따라서 판결의 결론을 달리하기도 한다. 

200년 이상 일관성 없는 법원의 판결이 계속돼 오다가 1848년 영국에서 폴리 대 힐(Foley vs Hill)이라는 획기적인 판결이 나오면서 은행의 역사가 바뀌게 된다. 영미에서는 판례 이름에 원고와 피고의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Foley가 예금주고 Hill이 은행이라는 사실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원고는 은행이 자신의 동의 없이 자신의 소유물인 금화를 대출 형태로 처분했으므로 횡령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피고 은행은 자신이 예금주의 금화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단순한 채무불이행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예금주가 은행에 화폐를 맡기면 그 돈은 예금주가 아닌 은행에 속한다고 봤다. 은행은 예금주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돌려줄 의무가 있을 뿐, 예금주가 은행에 맡긴 돈은 소유권 측면에서 볼 때 은행의 돈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은행은 이 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판례의 법리에 따르면 은행은 예금주의 돈을 위험한 처지에 빠뜨렸든 해로운 투기를 했든 이에 답변할 의무가 없으며, 예금을 타인의 재산처럼 보존하고 처리할 의무가 없다. 은행은 계약의 구속을 받기 때문에 예금주가 저축한 금액만큼 반환할 의무를 질 뿐이다. 

이 판결을 계기로 은행 예금은 소비 임치(消費任置), 즉 수치인(은행)이 금전의 소유권을 이전받아 마음대로 소비하고 나중에 같은 금액의 금전을 반환할 의무를 부담하는 채권 계약의 성격을 갖게 됐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은행 예금은 예금주의 것이 아니라 은행의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리는 오늘날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다.

만약 개인이 1000만원의 여유 자금이 있어서 시중은행에 5.0%의 수신금리로 1년 만기 정기예금에 가입했다고 치자. 만기가 도래하는 1년 뒤에는 얼마가 돼 있을까. 시중은행에 맡긴 1000만원은 1042.3만원으로 늘어나 있을 것이다. 왜 1050만원이 아닌 1042.3만원일까. 그것은 발생 이자 50만원에 대해 7.7만원의 세금(이자소득세 14.0%+농어촌특별세 1.4%)이 붙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짠테크(짠돌이+재테크)의 길은 허망해 보인다. 하지만 복리(複利)가 무서운 것이다. 인내심을 갖고 시간과 싸우면 거북이도 토끼를 이기는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도 기회비용이 다시 문제 된다. 허리띠 졸라매고 노후에 원하는 부(富)를 이루었더라도 젊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