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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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주류 경제학자들은 화폐의 ‘개념’에 대해 적당히 얼버무린 뒤 화폐의 ‘기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레고리 맨큐, 벤 버냉키, 대런 아세몰루의 경제학 교과서도 그러하다. 경제학자들이 공통으로 언급하고 있는 화폐의 기능으로는 첫째 교환의 매개 수단, 둘째 회계의 단위, 셋째 가치의 저장 수단이 있다.

우리가 편의점에서 현금 900원을 주고 생수 1병을 사는 것처럼 화폐를 상품 구매에 사용하면, 경제학자들은 이를 두고 화폐가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결국 ‘교환의 매개 수단’이란 계약(채무)의 이행 수단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화폐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기능이다.

화폐는 모든 사물의 경제적 가치를 측정하는 기본적 척도로 기능하는데,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화폐가 ‘회계의 단위’로서 기능한다고 말한다. 결국 ‘회계의 단위’란 화폐가 편의점에 진열된 물건의 가격표로 기능한다는 의미다. 사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국내의 모든 상품 가격이 ‘원’이라는 화폐단위로 표시되도록 국가가 강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화폐의 기능이라기보다는 국가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화폐의 가치 저장 기능의 허구성

화폐는 부(富)를 보유하는 방법으로도 이용되는데,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화폐의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이라고 말한다. 

버냉키의 예시에 따르면, 할머니가 침대 매트리스 밑에 현금을 몰래 넣어 두거나, 한밤중에 스크루지 영감이 오래된 오동나무 아래 금화를 묻어두거나, 런던의 상인이 요구불예금 계좌에 잔액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들은 부의 일부를 화폐의 형태로 보유하는 것이고 이때 화폐는 가치 저장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화폐는 부를 보유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화폐는 회사채나 주식처럼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지도 않고, 쉽게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금은 익명성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범죄자나 국세청의 관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가치 저장 수단이 된다.

화폐의 기능에 대한 주류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설명은 금본위제에 머물러 있다. 특히 주류 경제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시대착오적이다. 왜냐하면 금본위제 아래에서는 디플레이션, 즉 물가의 하락과 화폐가치의 상승이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침대 밑에 화폐를 끼워 두거나 오동나무 아래 금화를 묻어두면 장래 그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종이 화폐 제도 아래에서는 인플레이션, 즉 물가의 상승과 화폐가치의 하락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침대 매트리스 밑에 화폐를 끼워두거나 이자가 지급되지 않는 은행 요구불예금에 예치하면 장래의 화폐가치가 하락하게 된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화폐의 가치 저장 기능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국가의 화폐 착취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화폐의 가치 저장 기능은 국왕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유럽 화폐의 역사는 주화의 귀금속 함량을 인위적으로 저하하는 디베이스먼트(debasement)의 역사였다. 프랑스에서는 1285년부터 1490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3번이나 주화의 귀금속 함량을 줄였다. 1349년에는 주화의 귀금속 함량이 75%나 감소했는데 이것은 모두 국왕의 차지였다. 액면가는 같지만, 귀금속이 적게 들어간 새로운 주화를 발행하면 국왕은 더 많은 시뇨리지, 즉 화폐 주조 차익을 얻게 된다. 따라서 디베이스먼트, 즉 화폐의 품질 저하는 국민에 대한 일종의 은폐된 세금으로 작용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현대 중앙은행이 종이돈을 남발해 초래하는 인플레이션을 조세(inflation tax), 즉 디베이스먼트라고 말한 바 있다.

16세기 영국인은 엘리자베스 2세의 먼 할아버지 격인 헨리 8세를 ‘늙은 코주부’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유통 중인 주화에 새겨진 헨리 8세의 초상 중에서 코 부분이 유난히 빨리 붉은 빛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더 많은 시뇨리지를 얻기 위해 구리 돈을 은으로 도금해 유통했고, 시중에서 은화를 사용하다 보면 표면의 은이 닳아서 그 속의 구리가 드러났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 영국 정부는 모든 주화의 은 함량을 92.5%에서 50%로 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영국 화폐에서는 은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디베이스먼트와 효과는 동일하지만, 훨씬 더 교묘한 방법으로는 리코인(recoin), 즉 신구 화폐의 교환이 있다. 리코인은 낡은 주화를 새 주화와 교환해주되 교환 비율을 축소하는 방법이다. 영국 왕실은 6년마다 기존의 모든 주화를 무효화시키고 이후 4년 동안 3 대 4의 비율로 신구 주화를 교환해줬다. 이에 따라 국왕은 6년마다 25%의 시뇨리지, 즉 화폐 주조 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디베이스먼트와 달리 리코인의 경우 신구 주화에 동일한 양의 귀금속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현대적 리코인, 신구 화폐 교환

2022년 10월 1일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은 기존의 종이돈을 폐기하고 플라스틱을 법화(legal tender)로 채택했다. 일종의 리코인, 즉 신구 화폐 교환을 한 것이다. 다만 중세의 리코인과 다른 점은 신구 화폐의 교환 비율을 축소해 국왕이 시뇨리지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교환에 응하지 않는 퇴장화폐 또는 사과박스로 유통되는 암시장 화폐의 시뇨리지를 영란은행을 통해 내각이 수거하겠다는 것이었다. 새 은행권은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머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종이돈에 비해 수명이 최대 2.5배 길고, 탄소배출량도 16%가량 감소한다는 것이 영란은행 측의 설명이다.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함에 따라 왕실 전통에 따라 모든 은행권의 앞면에 새로운 국왕 찰스 3세의 초상화가 사용될 예정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기존 은행권은 새로 발행하는 은행권과 함께 통용될 예정이다. 참고로 영국은 화폐 발행권이 이원화돼 있다. 은행권은 영란은행이 발행하고 주화는 왕립조폐청이 발행한다. 유럽에서 화폐는 원래 국왕의 인장이 찍힌 금화나 은화였고, 은행권은 금화나 은화의 보관증 또는 약속어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부터 2022년까지 96세를 살았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육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찬란했던 대영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부터 2022년까지 70년 동안 통합왕국(United Kingdom)의 군주로 군림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윈스턴 처칠에서 보리스 존슨까지 15명의 영국 총리가 교체됐고, 트루먼에서 바이든까지 14명의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대영제국이 수립한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달러 중심의 브레턴우즈 체제가 성립되는 것을 봤고, 베트남전의 여파로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변동환율제가 들어서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화폐가 금에서 종이로 변하고, 다시 플라스틱으로 바뀌는 시대를 지켜봤다. 이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포스트 엘리자베스 시대에 화폐는 어떻게 변하고, 국가는 어떤 형태로 화폐를 착취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