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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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여진 쿼드자산운용 PEF운용본부 매니저 연세대 경영학,전 신영증권 제약· 바이오 애널리스트
엄여진 쿼드자산운용 PEF운용본부 매니저 연세대 경영학,전 신영증권 제약· 바이오 애널리스트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 대형 포유류의 절반 이상은 멸종했다. 지금은 화석으로나 만나볼 수 있는 매머드와 검치호랑이, 자이언트 나무늘보 등 대형 포유류는 1만 년 전을 전후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 대형 포유류가 대멸종에 이른 원인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새로운 이론과 가설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사냥이나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생존의 위기를 맞은 대형 포유류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멸종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유동성 파티가 끝나고 경제 침체와 금리 인상으로 돈줄이 막힌 현재 벤처 투자 시장은 과거 빙하기와 유사하다. 저금리 시대가 끝나면서 유동성이 줄어들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벤처캐피털(VC)들의 돈줄이 말라가고 있다. 신규 투자가 필요한 초기 벤처기업들은 물론이고 작년까지 여유롭게 투자받아 풍족한 자금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벤처기업까지 혹한기에 접어들고 있다. 자금난을 겪는 기업들은 진행 중인 연구개발(R&D)이나 향후 진행할 다양한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이 예상된다. 이로 인한 파급 피해는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 기업은 존속조차 불확실하다.

그러나 빙하기에 살아남은 포유류들을 보자. 빙하기 이전에 번성했던 포유류 대부분이 멸종했지만, 혹독한 기후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한 작은 포유류들은 이후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기후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 서식지를 옮기거나 먹이를 줄이며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작은 포유류들은 이후 생태계의 꼭짓점에 군림한다. 이들이 보여주듯 벤처기업이 현재의 투자 빙하기에 경영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성장을 위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해 생존한다면 향후 산업 재편으로 형성될 새로운 환경에서 그들은 빙하기 이후의 포유류처럼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투자 혹한기 시작됐다

현재 투자 업계는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다. 출자자들부터 이미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으며 시장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굳이 투자에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라이파우더(미소진 투자 자금)가 충분해, 투자 여력이 넉넉한 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들도 지금은 투자에 나설 필요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증시의 바닥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 전반에 불안 요소가 산재해 있다. 최근에는 강원도의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로 채권 시장까지 불안에 휩싸이며 기존의 자금으로 운용이 가능한 투자자로서는 기업들의 자금난이 본격화하기까지 투자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 가기 어렵다.

이미 주식 시장의 침체와 대체투자 시장의 밸류에이션 하락으로 비상장 기업의 인수합병(M&A)은 물론이고 상장 기업의 메자닌(주식과 채권의 중간 성격을 띠는 금융 상품) 투자조차 이미 투자자 우위 시장이 됐다. 전반적으로 기업 가치의 벨류에이션이 하락하게 되자, 향후에는 더 낮은 기업 가치로 투자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당분간 사모펀드와 VC, 자산운용사 등 주요 투자자들의 투자 활동은 소극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에 시장 가격이 명확한 상장사는 물론 비상장사도 예외 없이 눈높이를 스스로 낮춰야 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올해 상장이 예정돼 있던 대어급 기업들도 상장 시점을 조금씩 늦추고 있다.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란 해석도 있지만, 이전의 몸값을 투자자들로부터 끌어내긴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다. 상장 시점을 내년 또는 내후년으로 미루더라도 기존 시점을 기준으로 성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밸류에이션 프리미엄이 되살아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벤처기업은 달라진 투자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그간의 유동성 파티가 스타트업 생태계에 착시 효과를 일으키면서 위기를 더 키운 것도 짚어볼 만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투자자 모두가 지갑을 닫은 이후에도 자율주행 같은 혁신적인 기술 분야에서 투자금이 마르지 않고 있는 것은 의외다. 작년까지만 해도 적잖은 스타트업이 이렇다 할 만한 기술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시장에 넘치는 유동성 덕분에 높은 기업 가치를 쉽게 인정해주고 투자를 집행했지만, 정작 스타트업의 성장이 시장 기대에 못 미치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회사가 아직 기술을 정립하지 못하고 사업 계획만 있을 뿐인데도 경영진이 개개인의 화려한 업력만을 내세워서 벤처 투자 붐에 힘입어 투자받으려고 섣불리 창업한 기업도 많았는데, 이러한 기업에 투자한 VC가 많다는 현실은 우려스럽다. 이 기업들이 앞으로 추가로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다. 특히 바이오와 정보기술(IT) 등 기술력이 중요한 분야일수록 맹목적인 투자가 심각한 상황이다. 일부 기업의 사업 모델이 성공하자 수년간 다른 스타트업들이 우후죽순 뛰어들면서 투자받았는데,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차별화 실패와 성과 부재로 폐업하는 사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살아남는 기업이 최후 승자

국내 스타트업은 규모와 업력 등을 막론하고 자금난에 신음 중이다. 인지도 높은 기업 중에서도 폐업과 서비스 중단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기업공개(IPO) 시장도 싸늘해 이미 자리 잡은 대형 스타트업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한국거래소의 상장 예비 심사를 통과해 상장을 눈앞에 둔 기업들도 기업 가치가 반 토막이 난 경우가 허다하다. 회사의 높은 비용 부담, 만성 적자 상태, 이를 타개할 새로운 혁신 동력의 부재 등 벤처기업의 성장성에 시장은 냉혹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벤처기업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냉혹해진 시장의 옥석 가리기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기업 규모를 막론하고 어려움에 부닥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년은 풍부한 유동성으로 인해 벤처 투자가 역대 최대를 기록한 한 해였다. 2000년 벤처붐에 이어 제2의 벤처붐이 이뤄졌다는 평가까지 있었으나, 인제 와서는 유동성으로 인해 무분별한 투자가 이뤄져 버블이 만들어졌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2000년 벤처붐 당시에도 10년도 안 돼 벤처기업 절반 이상이 폐업하며 이에 투자한 투자사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경제위기에서 돈을 벌어온, 뼈가 굵은 진짜 부자들은 내년부터 슬슬 투자를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지금보다 낮은 가격으로 좋은 기업에 투자하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번 빙하기를 지나면 벤처기업의 절반 이상은 얼어 죽을 것이다. 또는 기업 가치가 절반 이하의 가격이 돼 있을 것이다. 대형 포유류 같은 벤처기업은 안타깝게도 날씨가 따뜻할 때 인기 배우와 톱모델이 나오는 광고비에 돈을 이미 실컷 썼다. 실제로 체구가 큰 대형 포유류들은 거의 다 죽었다. 이제 온도 변화에 적응 잘하고 조금만 먹어도 살아남는 포유류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결국 빙하기에 살아남는 기업들에만 투자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살아남는 자들이 승자가 될 것이며 승자 독식(Winner takes it all)의 시장이 다시 오겠다. 투자자는 지금이 투자를 준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