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오늘날 전 세계 중앙은행의 모델이 된 영란은행(BOE)은 얼마 전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의 먼 할아버지 격인 윌리엄 3세의 발명품이다. 당시 윌리엄 3세는 프랑스에 패배한 후 영국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120만파운드의 군자금이 필요했다. 우선 영국 국왕은 ‘백만장자의 모험’이라는 이름의 복권을 만들어 국민에게 팔려고 했지만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 이후 영국 국왕은 네덜란드나 스웨덴처럼 국가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은행을 설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 국왕은 국채를 팔아서 설립 자금을 마련할 만한 신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윌리엄 3세는 외국인, 즉 영국 국민이 쫓아낸 선왕(제임스 2세)의 사위 자격으로 즉위한 네덜란드 출신 왕이었기 때문이다.


최초 중앙은행은 민자 유치 기업

결국 영국 국왕은 기업인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국가-민간 파트너십 형태로 은행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민간 자본에 맡겼던, 소위 ‘민자 유치’ 사업의 효시와도 같은 것이다. 영란은행은 국왕에게 금을 대출해주고, 국왕으로부터 대출 금액에 상응하는 국채를 넘겨받은 후, 국채를 근거로 어음(은행권)을 발행했다. 영란은행의 특별한 점은 ‘국왕에 대한 대출 기관’이라는 점과 ‘런던 시티 지구의 은행권 발행을 독점’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전자의 사실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국채 매매와 연결되고, 후자는 중앙은행의 독점적 발권력과 연결된다.

당시 영란은행은 국가(국왕)로부터 대출 원금에 대한 영구 이자 8%와 연간 4000파운드의 서비스 수수료를 얻을 수 있었고, 민간으로부터도 대출 및 예금 업무를 통해 상당한 이자와 수수료를 벌 수 있었다. 일본이 설립한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도 초창기 영란은행과 마찬가지로 민간을 대상으로 한 예금 업무와 대출 업무를 수행한 바 있다. 영란은행의 발행 주식은 단기간에 소수의 자본가에게 인수됐고, 영국 국왕에게 큰 성공을 안겨 주었다. 골치 아픈 의회를 통하지 않고 재정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란은행은 런던의 일개 민간은행에 불과했지만 국왕과 유착 관계를 배경으로 단기간 에 영국 최대 은행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영란은행의 시장 지배적 지위가 전쟁이나 금융 공황 같은 역사적 우연과 결합하면서 영란은행은 점차 중앙은행의 임무를 떠안게 된다. 


지폐는 중앙은행의 부채

영란은행의 최초 특허장에는 은행권(영수증, 약속어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은행권은 영란은행의 사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됐다. 다른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영란은행도 예금(주화)을 수취하면 고객에게 은행권을 발행해주었고, 대출해주는 경우에도 차입자에게 주화 대신 은행권을 내주었다. 은행권은 은행 직원에 의해 직접 손글씨로 작성됐고, 액면가도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은행권에는 ‘소지인의 지급 요구에 따라 총액을 무기명으로 지급하겠다’는 지급 약속 문구가 적혀 있었다. 따라서 은행권이 적절하게 배서된 경우 은행권 소지인은 영란은행에 가서 은행권에 적힌 금액의 전부나 일부를 금화나 은화로 교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은행권은 원래 금의 수령을 확인하는 영수증이자 금의 지급을 약속하는 약속어음이었다. 영란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왕실의 승인을 받아 곧 화폐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영국 파운드화 지폐의 앞면에는 ‘소지인의 지급 요구에 따라 ◯◯파운드를 지급하겠다(I promise to pay the bearer on demand the sum of ◯◯pounds.)’는 지급 약속 문구가 적혀 있다. 하지만 금에 대한 지급 의무가 사라진 오늘날 영란은행은 도대체 무엇을 지급하겠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최근 공시한 한국은행의 대차대조표(2022년 8월 말 기준)에도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178조8145억원)는 중앙은행 부채로 표시되어 있다. 법리적으로만 따지면, 추석날 용돈을 받은 조카가 한국은행 점포에 가서 1만원권을 제시하면 그들은 1만원 상당의 부채를 상환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그 빚을 갚겠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독립성이라는 신화

새로운 발명은 기존의 기술과 오래된 관행이 충돌하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영란은행은 기존의 은행 네트워크가 지닌 금융 기술과 오래된 국가 권력이 융합하여 탄생했다. 은행권이라는 새로운 화폐는 주권자인 국왕의 인장에 의해 금화나 은화처럼 인증됐다. 따라서 국가와 민간 사이에 통화 주권이라는 국가 권력의 이전이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 사업자들이 정부의 돈을 발행하고 통제하는 일에 직접 관여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설명한 것처럼, 과거에는 민간 사업자들이 의회를 통해 국가 권력을 간접적으로 통제했다면 이제는 영란은행의 지분을 통해 국가 권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 중앙은행의 모델이 된 영란은행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은 중앙은행이 처음부터 특별한 공적 기구로서 설립된 것처럼 설명한다. 그리고 중앙은행을 국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익의 수호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초기에는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금본위제하에서는 금의 자동 조정 기능 때문에 통화 정책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이 최초의 중앙은행이라고 여기는 영란은행은 태생적으로 독립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민간이 주식을 보유한 주식회사였기 때문이다. 영란은행은 사유 재산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존 로크가 기본권으로 격상시킨 사유 재산의 법적 성질에서 유래한 것이지, 통화 정책이라는 공적 임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영란은행, 분데스방크(독일), 일본은행, 스위스국립은행 등 전 세계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주식회사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영란은행은 원래 런던의 고리대금업자들이 몰려 있는 시티 지구 내의 작은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란은행이 영국 국왕과 체결한 계약은 신의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연히 모든 관계자에게 막대한 부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영란은행의 대출 덕분에 영국 왕실은 성공적으로 해군을 재건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제철, 기계, 목재 등 나머지 경제 부문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듯 영란은행의 최초의 역할은 ‘국왕의 금고’였다. 이후 영란은행은 전 세계 다른 중앙은행의 판형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대부분의 국가는 군주국이었고 국왕은 금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폐의 발전이 결국에는 세계 금융 시스템을 재편하게 됐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혁명적인 사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은행권은 단지 은행이 발행한 영수증일 뿐으로 다른 것(금)을 가리키는 지시 증서였고, 금괴와 주화 같은 실제 돈은 은행 금고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은행 시스템은 지금까지 발명된 것 중에서 가장 놀랍고 교활한 손재주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도 은행은 청중들을 속이는 것 같았다. 예금 지급준비금은 금으로 구성되는데, 영란은행은 의도적으로 적립금의 정확한 규모를 밝히지 않았다. 의회에서 준비금의 규모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영란은행 대표는 ‘매우 상당하다’는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오늘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나 한국은행 총재는 매월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 참석한다. 그리고 향후 경제 전망이나 통화 정책의 효과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상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애매한 답변으로 일관한다. 우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왕관이 만들어낸 우상의 힘(Idola theatri)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