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경제학의 원래 이름은 정치경제학이었다. 이를 방증하듯 애덤 스미스의 계보를 잇는 고전파의 아버지들은 ‘정치경제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라는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1817년 리카르도, 1820년 맬서스, 1848년 밀이 각각 이러한 책을 출간한 것이다. 이러한 대가들의 텍스트는 오늘날의 조잡한 경제학 교재들과 달리 수학 공식 하나 없이 만연한 산문 형식으로 쓰여 있고, 특히 철학자 밀의 경우 풍부한 수사와 장엄한 어조가 일품이다. 이들은 탁월한 관찰력과 상상만으로 시장경제 이론, 즉 자연법칙(보이지 않는 손)이 생산과 교환을 지배하는 자율 규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살던 시대에는 정치학, 경제학, 윤리학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은 상호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신념 체계로 작용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신념 체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보호무역을 비난했다. 그는 보호무역이 국내 기업(생산자)에만 이익이 되고, 나머지 국민(소비자)에게는 손해라고 주장했다. 보호무역은 값싼 외국 상품의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국내 소비자의 현금흐름을 비효율적으로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스미스 이후 리카르도는 국제 무역에 관한 최고 권위자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경제학 교과서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그는 국제 분업을 바탕으로 한 ‘비교우위론’으로 유명하다. A국이 절대우위에 있고 B국이 절대열위에 있더라도 두 나라 모두 생산비(기회비용)가 상대적으로 더 적게 드는 상품에 특화하여 교역하면 상호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갑(甲)은 낚시와 수렵 능력이 각각 10에 해당하고 을(乙)은 낚시와 수렵 능력이 6과 8에 해당한다면, 일견 갑 혼자 낚시와 수렵을 다 하는 것이 이득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수렵은 을에게 일임하고 갑은 낚시에 전념하면 보다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 오늘날처럼 국제 분업이 고도화한 시기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돌아와서 이 광경을 지켜본다면 매우 감격할 것 같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 기업들이 보다 큰 이윤과 값싼 노동력을 찾아 지속적으로 이동하다 보니, 중국은 세계의 신발 공장이 되었고 브라질은 전 세계의 닭 농장이 되었으며 러시아는 유럽의 가스관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디아, 중국, 남아공)는 전 세계의 원자재와 생필품 공장의 역할을 도맡게 됐고, 미국은 전 세계의 돈 공장(중앙은행)이자 글로벌 소비자의 역할을 떠안게 된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경제가 소비 경색에 시달리면서 최종 소비자를 필요로 할 때마다 미국의 가계는 양적 완화로 풍부해진 달러 유동성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제를 기꺼이 구제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흥청망청한 최종 소비자 생활이 이제 우리 모두에게 쓰디쓴 결말을 초래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재화가 풍부했기 때문에 소비자를 찾아내는 것이 과제였다. 큰 폭의 무역수지 흑자를 누리던 독일, 중국 등은 다른 나라의 수요에 의존하는 기생적 경제라든지, 타인의 몫을 나눠주지 않는 이기적인 국가로 매도되기도 했고, 독일과 중국을 부자로 만든 애덤 스미스와 그의 자유무역주의가 비난받기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무역 적자는 제국의 은혜와 관대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시기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전 세계의 사람, 특히 미국인은 호텔, 외식, 헬스클럽 등 각종 서비스의 이용을 자제하는 대신 TV, 노트북, 실내 자전거 등 재화를 더 많이 구매했다. 월마트나 아마존 같은 대형 리테일러들이 재고를 잔뜩 쟁여놓고 미국인의 과소비를 부추긴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비재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코로나19로 인한 공급 축소와 미국의 수요 증가는 다른 나라의 상품 가격을 함께 끌어올렸다. 

그리고 희소성의 시대가 오자 사정이 완전히 뒤집혔다. 하버드대 경제학과의 제이슨 퍼먼(Jason Furman)은 “이처럼 공급 부족의 시대가 도래하면 미국처럼 수요만 창출해내는 국가는 자국의 문제, 즉 인플레이션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자국 내 과열을 식히고 인플레이션을 짓누르기 위해 이자율을 급격히 감아올리자 초강력 달러라는 채널이 작동하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해외에 수출되고 있다. 나머지 국가들이 그 부담을 떠안고 골머리를 앓게 된 것이다. 달러가 강세를 보임에 따라, 미국 이외의 국가들은 달러로 표시된 모든 종류의 원자재, 특히 원유를 훨씬 비싸게 구매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코로나19로 유발된 글로벌 공급망의 와해를 가속화하는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와 식음료 가격이 폭등하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다. 퍼먼에 따르면 이러한 인플레이션은 상당 부분 미국이 수출한 것이다.

지난 수년 동안 대부분의 통화가 달러에 대해 약세를 시현했다. 따라서 미국은 더 ‘싸게’ 물건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나라는 더 ‘비싸게’ 물건을 수입해야만 한다. 바르셀로나대 경제학과의 루카 포르나로(Luca Fornaro)는 이런 상황을 ‘반전된 통화 전쟁(reverse currency war)’에 비유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많은 나라가 수출을 늘리기 위해 자국 통화의 가치를 하락시켰다면, 코로나19 이후에는 자국 통화 가치를 상승시켜 무역 적자를 일으킴으로써 국내적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반전된 통화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정도에 불과하고, 그 승자는 미국이 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통화 전쟁에서는 해외 에너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아시아 국가들이 특히 취약하다. 달러라는 글로벌 화폐를 보유한 미 연준과 달리 아시아 각국의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작다. 이런 제약 요인 때문에 달러 강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충격이 아시아 경제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아시아와 미국 간 금리 격차가 커질 경우 급격한 자본 유출과 달러에 대한 아시아 각국 통화의 평가 절하가 발생하고 다시 이것이 더 큰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민주당이 행정부(대통령)와 하원(435석중 220석)에서 우세하지만 상원(100석 중 48석)과 대법원(9명 중 3인)에서 밀리고 있다. 따라서 2022년 11월 8일 실시되는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정치적 운명과 경제적 향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중간선거는 미국 대통령 임기(4년)의 중간(2년)에 시행되는 선거로서, 연방 하원 전원과 상원 3분의 1을 새로 뽑는다. 중간선거는 미 대통령의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선거인 만큼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다. 바이든 행정부가 경기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단기간 내에 물가 잡기에 성공한다면, 미국인은 더욱 강해진 달러를 가지고 더 많은 해외 상품을 구매하고 더 값싸게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며,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임도 더 커질 것이다. 화폐의 중립성을 신봉하며 뉴턴 물리학과 미적분에 심취해 있는 경제학자들과 중앙은행 직원들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경제학의 원래 이름은 ‘정치경제학’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