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월급날이면 일부를 쪼개어 펀드에 넣는 투자 문화가 일반화된 시대다. 오늘날과 같은 펀드의 성장은 수많은 펀드의 거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을 보인 데에 힘입은 바가 크다. 펀드 분야의 거목들은 과연 어떤 이들일까. ‘펀드의 거인들’ 첫 회에서 ‘채권왕’ 빌 그로스를 만나본다.

세계 채권시장 주무르는

블랙잭의 고수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거치며 급부상한 ‘최고의 스타 투자 전략가’라면 미국 채권운용사 핌코(PIMCO)의 최고투자책임자인 빌 그로스를 들 수 있다. 물론 그는 이미 ‘채권왕’으로 유명했지만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와 금융위기를 예측하면서 말 그대로 ‘대박’을 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 경제 정책 당국자와 전문가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촉각을 세울 만큼 그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2005년 당시 빌 그로스는 핌코 사무실이 있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부동산 가격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게 거래되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는 즉시 회사 소속 애널리스트들을 미국 전역에 파견해 부동산 상황을 조사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 주택대출이 과도하게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로스는 그해 10월 투자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를 경고하면서 “펀드에서 리스크가 높은 주택 채권을 제외하겠다”고 공표했다. 이후 한동안 핌코의 수익률이 떨어지면서 힘든 상황을 겪어야 했지만 불과 1년여 만에 그의 경고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펀드 투자자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국책 모기지업체 투자해 대박

이뿐 아니다. 그는 금융위기 속에서 미국 양대 국책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채권에 투자해 하루 만에 17억달러를 벌어들였다. 미국 정부가 두 업체를 부도처리하지 않고 결국 인수할 것으로 판단해 정부의 구제금융 발표에 앞서 채권을 대거 사들인 것이 적중했다. 결국 경제위기로 전 세계가 신음 속에 있던 2008년에도 그의 펀드는 4.3%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핌코는 세계 최대 채권운용회사로, 빌 그로스는 이곳에서 자산규모 1580억달러의 ‘토털 리턴 펀드’를 운용하며 세계 채권시장을 주무르고 있다. 월가의 채권 트레이더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월가에서는 ‘비치가 움직인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진다. 이는 핌코의 본사가 캘리포니아 주 뉴포트 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채권 펀드는 대부분 채권의 이자수입으로 주로 수익을 올리는 데 반해, 빌 글로스는 채권 거래를 통한 자본 차익과 외환 거래를 통한 환율 차익까지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그로스의 동물적인 베팅 기술은 도박의 일종인 블랙잭을 마스터한 덕분이다. 대학시절 그로스는 심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 두개골 일부가 날아가 이를 재이식하면서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지냈다. 병원에서 그는 수학 교수인 에드워드 도르프가 쓴 <딜러를 이겨라>라는 블랙잭 서적을 탐독했다.

1966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단돈 200달러를 들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당시 그로스는 3개월 동안 하루에 무려 16시간을 블랙잭에 몰입한 결과, 원금을 50배(1만달러)로 불릴 수 있었다.

그로스는 “블랙잭에서 ‘왕카드’가 많이 나와 딜러가 이길 확률이 높으면 베팅을 조금하고, 내가 이길 확률이 높으면 2~4배로 베팅했다”며 “당시 터득한 수학적 사고와 리스크 관리를 채권 투자에도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블랙잭으로 UCLA 비즈니스스쿨(MBA)의 학비도 마련했다.

그로스는 1970년 퍼시픽 뮤추얼 생명보험회사의 채권부서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채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주식 펀드매니저가 되기 위한 징검다리 과정으로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다. 채권과의 인연은 아주 우연하게 시작된 것이다.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반 만인 1971년, 그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회사를 나와 핌코를 설립했다. 이후 그로스는 30여 년 동안 채권왕으로 군림하면서 미국 월가의 거물로 성장했다.

우표 투자 솜씨도 수준급

빌 그로스는 채권뿐만 아니라 우표 수집에도 남다른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고전 우표들을 2007년 뉴욕 경매시장에 내놓으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로스가 보유한 우표들의 연 평균 수익률이 5년간 13.5%나 됐기 때문이다. 그는 경매 수익금을 ‘국경없는 의사회’에 기부했다. 이밖에도 빌 그로스는 요가를 즐기거나 값비싼 에르메스 넥타이를 목에 스카프처럼 두르고 나타나 사람들에게 즐거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빌 그로스의 투자 철학은 ‘장기적인 관점과 포트폴리오의 구조적 조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2005년에 쓴 <돈을 버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돈 관리에 성공하려면 3~5년 정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며 “장기적인 관점은 단기적인 공포와 탐욕에서 오는 손실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역설했다. 또 포트폴리오는 단기적인 의사결정에 구애 받지 않고 짜야 하며 이는 농구경기로 치면 경기시간뿐만 아니라 휴식시간에도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빌 그로스는 “경제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새로운 전형(New Normal)’으로 바뀌었다”면서 “험난한 여정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새로운 전형’이란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를 특징짓는 표현이다. 시장, 가계, 제도 및 정부정책 등에 초래된 격렬한 변화 중 상당수가 예전으로 복귀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 결과 세계 성장은 한동안 낮은 수준으로, 저축과 실업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며, 정부의 개입은 강화되고 기존 글로벌 시스템의 응집력은 약화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런 변화의 동력을 빌 그로스는 ‘DDR’이라고 표현했다. DDR이란 ‘레버리지 축소(De-leveraging), 탈세계화(De-globalization), 재규제(Re-regulation)’를 말한다. 그동안 세계 경제 성장을 이끈 신용 창출은 막을 내리고, 아울러 달러화를 중심으로 글로벌 차원에서 저축을 동원하고 또 분배해온 세계화가 퇴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민간 자율의 신화는 붕괴되고 정부 역할이 강화될 것으로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