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연이은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으로 돈이 몰리고 있다.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기는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ELD·금·MMDA로 '대이동'

전 세계적인 경제 악재가 쏟아져 나오고 한국 금융시장도 이에 따라 연일 흔들려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극도로 커지고 있다.

주가와 환율은 미국에서 발표되는 여러 지표에 따라 정신없이 출렁거리고, 제아무리 뚝심 있는 투자자라도 밤잠을 제대로 이루기 힘든 상황이다. 은행과 보험사 등 금융회사들은 맡긴 돈을 떼이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고객들의 문의전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내에 상륙한 미국발 금융위기는 개인들의 돈의 흐름을 바꾸었다. 위험자산(주식·펀드 등)에 투자됐던 돈이 채권·예금 등 안전자산으로 이동하는 이른바‘안전으로의 탈출(flight to safety)’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투자자들에겐 예전 같으면‘내 돈이 얼마나 불어날까’가 제일 큰 관심사였지만, 이젠 ‘돈이 얼마나 안전한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시중에 떠도는 유동성은 초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으로 몰리고 있다. 국민·신한·우리·하나·기업·외환은행 등 6개 시중은행의 총수신 잔액은 2월 말 기준 711조8740억원으로, 전월 말 대비 10조9382억원이나 증가했다.

6개 시중은행 총수신 잔액 711조원 달해

한국은행의 연이은 기준금리 인하로 은행 예금금리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현재 은행권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연 3%대에 불과하다. 이자소득세에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나 다름없다.

최근 시중은행에서 연 3.7%짜리 1년 만기 정기예금에 가입한 회사원 강진경씨(35)는 “작년 말만 해도 연 7%짜리 예금이 많았던 것 같은데, 불과 몇 달 사이 연 3%대로 금리가 반 토막이 나버려 당황했다”며 “하지만 주식이나 펀드에 돈을 넣긴 불안하고 여윳돈을 굴릴 데가 마땅치 않아 그냥 안전하게 은행 예금에 넣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때 고수익을 보장했던 펀드로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은 고객들이 은행 예금은 금리는 낮지만 믿을 만한 상품이라고 인식, 꾸준히 돈을 넣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 3%대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성에 차지 않지만 수익을 바라보고 주식이나 펀드에 돈을 넣는 것은 망설여지는 투자자들이 눈여겨보는 상품이 바로 은행에서 한시 판매하는 지수연동정기예금(ELD)이다. ELD란 원금이 보장되면서 코스피200 지수를 비롯한 기준지수의 변화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틈새상품이다. 최근 은행들이 선보이고 있는 ELD는 만기까지 지수가 상승하기만 하면 연 6~7%의 금리가 적용돼 정기예금보다 많은 이자를 얻을 수 있고 지수 상승률에 따라 연 10% 이상의 고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만약 지수가 하락하더라도 이자는 받을 수 없지만 원금 손실을 입지는 않는다. 단 중도 해지를 할 경우에는 수수료가 부과돼 손해를 볼 수도 있으니 1년 이상 예치할 수 있는 돈을 넣어두는 것이 좋다.

금 관련 상품에 돈 쏠림 현상

금(金)은 예로부터 종이돈을 대신할 수 있는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꼽혀 왔다. 그런데 최근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심화되면서 금 관련 금융상품 수요는 폭발하고 있다. 특히 올 들어 금 관련 상품 수익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문의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금에 투자한 사람은 환(換)차익에다 금값 상승분까지 더해져 매우 높은 수익을 올렸다. 지난 2월 말 국내 순금 한 돈 소매가격은 21만원을 기록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금값이 단기간에 급등한 것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경제가 당분간 좋지 않아 안전자산인 금으로 투자자금이 계속 몰릴 것 같다고 예상하고 있다.

은행에서 판매하는 금 통장은 가입자가 돈을 입금하면 금으로 바꿔 적립해주는 식이다. 당장 실물을 사지 않아도 되는 만큼 보관에 대한 걱정을 줄일 수 있는 데다 소액으로도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세제 면에서도 실물이 아니라 부가세 부담이 없고 금 관련 파생거래로 발생한 수익이라 시세차익은 비과세를 받을 수 있다. 단 금에 투자한다면 금값이 높은 변동성과 환율 변동에 민감하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빠르게 오른 만큼 떨어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MMF에 126조원 쌓여

은행에서 판매하는 수시 입출금 식 예금(MMDA)은 끝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글로벌 금융위기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정거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돈을 빨아들이고 있다. MMDA는 은행권이 최근 몇 년간 불어 닥친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열풍에 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판매에 나선 단기 금융 상품이다. 1인당 원리금 합쳐 5000만원까지 예금자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수시 입출금이 가능하고 보통예금(연 0.1~0.2% 수준)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한다. 가입기간이 아니라 예치금액에 따라 금리가 달라지며, 확정금리로 이자를 지급한다. 3월 기준 1억원 이상 가입 시 3%대 금리가 제공된다. 1억원 이상 거액을 짧은 기간 맡길 경우에는 MMDA도 다른 상품에 크게 뒤지지 않는 셈이다. MMDA와 어깨를 겨루는 상품으로 머니마켓펀드(MMF)가 있다. 예금자보호법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MMDA보다 약간 높은 수익률이 매력으로 부각되면서 최근 126조원의 뭉칫돈이 쌓여 지난 3월10일 사상 최고 설정액을 기록했다. MMF는 자유롭게 입출금이 가능하고 단 하루만 맡겨도 은행 보통예금보다 높은 이자를 지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