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바꿔 말하면 강산이 변하는 데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는 뜻인데, 국내외 자산시장은 불과 1년 사이 상전벽해를 느낄 만큼 돌변했다. 지난 1년 사이 태평양 건너 남의 나라 부동산 용어인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 되어버렸고, 주식이 없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던 보수적 투자자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최근 3~4년 사이 주식 투자자들을 마취시켰던 유포리아(행복감)는 간 데 없이 사라졌고, 깊은 공포와 비탄이 그 공백을 채워버렸다.

파생상품 시장의 문제보다

美·中 소비·생산·투자 과잉에서 비롯

주식뿐 아니라 부동산, 원자재, 심지어 와인과 미술품까지 ‘투자자산’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일제히 파죽지세로 오르던 자산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오를 때만큼이나 떨어지는 속도도 가파르다.

투자자산이 일제히 하락세로 돌아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신용위축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약 70년가량 팽창 기조를 보였던 신용이 정점을 찍고 위축되기 시작했다는 것. 최근의 위기는 보다 거대한 사이클이 정점을 찍고 꺾이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장기적인 확장 국면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하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미국이 부실 금융회사에 달러화를 무제한 공급하기로 결정하는 등 주요 국가들이 통화를 풀어내고 있는데도 신용이 수축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한 금융회사가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커다란 손실을 떠안은 데 따라 이미 지난해 상반기부터 자금시장이 경색되기 시작했다. 또 최근에 미국과 유럽이 총 3조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안을 내놓았지만, 이 자금이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유통되며 신용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부실 금융회사로 흡수되고 있다. 막대한 자금을 집어 삼키며 글로벌 유동성 잔치에 찬물을 끼얹은 월가의 금융회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금의 위기를 일으킨 주범은 부동산 대출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파생상품이다. 부채담보부증권(CDO)을 중심으로 한때 선진 금융시장의 첨병으로 불리던 파생상품이 신용경색과 금융위기를 일으킨 것.

월가의 공룡 IB들은 수수료 수입을 벌어들이는 목적으로 파생상품을 남발했고, 신용을 창출하는 데만 급급했을 뿐 리스크 관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정부의 감독도 소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주택담보대출에서 발생한 채권은 MBS(주택저당증권)로, 다시 CDO(부채담보부증권)로 변신을 거듭했고,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최종 투자자는 최초의 대출자가 누구이며 신용상태가 어떤지 모른 채 펀드에 편입했다. 파생상품은 같은 신용등급의 회사채보다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면서도 다수의 투자자에게 위험을 분산한다는 이유로 첨단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실상 리스크 관리의 사각지대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파생상품 투자자가 최초 대출자의 원리금 상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와 함께 신용평가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상품의 원재료인 대출채권은 하위등급인데 여기서 A등급의 CDO를 발행, 시장에 A등급의 부채보다 자산이 더 많은 기형적인 현상이 나타났고 신용평가회사의 평가 역시 느슨했다는 지적이다.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뇌관을 안고 있던 파생상품은 주택 가격이 떨어지고 대출자의 원리금 상환이 연체되자 가치가 폭락했고, 여기에 투자했던 펀드가 대규모 손실을 안은 채 환매 중단에 이어 청산되기에 이르자 금융시장이 급격히 냉각된 것이다.

여기서 보듯, 금융위기의 표면적인 이유는 파생상품 가치 하락과 여기에 물린 펀드 및 금융회사의 부실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주택 시장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경기 둔화에 있다. 사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이전부터 많은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의 ‘버블’이 터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가계 저축률이 제로 수준으로 떨어진 채 막대한 부채에 의존해 소비를 늘리는 것으로 성장을 이어온 미국의 실물경기가 꺾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시야를 지구촌으로 넓히면 중국이 불균형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었다. 부채에 의존해 과도한 소비를 일삼는 미국이 소비 측면의 불균형을 대표한다면 중국은 미국의 소비를 과신하고 내수 경기의 뒷받침 없이 생산과 투자를 과도하게 집행함으로써 또 다른 불균형을 야기했다는 것. 파생상품 시장에서 촉발된 신용경색과 금융위기는 미국의 실물경기를 강타했고, 소비의 축이 무너진 데 따라 생산의 축이었던 중국 역시 일정 부분 성장률 둔화를 피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중국의 내수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인 미국이 지갑을 닫아버린 만큼 중국 역시 생산과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고, 이는 글로벌 경제의 위축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구제공조, 근본 처방인가

연초까지만 해도 국내외 정부는 이번 사태가 일부 금융업계에 국한된 문제일 뿐 경제 펀더멘털은 ‘이상 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사이 신용시장에서 금융시장 전반, 그리고 실물경기로 침체가 번져나갔고 글로벌 증시는 기록적인 대폭락을 겪었다.

이와 관련, 증권업계 투자가는 현재 주가를 움직이는 것은 기업의 신용 리스크이며, 신용 스프레드가 높아진 만큼 리스크 프리미엄이 커지면서 주가 하락을 부채질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실물경기 둔화에 따른 실적 악화 우려와 함께 ‘네가 주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업의 펀더멘털과 무관하게 기업의 밸류에이션을 할인하는 움직임이 바텀업(bottom -up)마저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시장을 패닉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다우존스지수가 한때 8000선을 깨고 내려가는 등 브레이크 없는 연쇄 급락을 보이던 글로벌 증시는 미국과 유럽, 일본까지 가세한 국제 구제공조에 따라 한숨을 돌린 모습이다. 하지만 이번 구제공조는 사태 해결을 위한 ‘첫 단추’일 뿐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결국 돈을 풀어 쓰러진 금융회사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구제공조 방안은 가장 시급한 과제인 금융회사의 부실을 해소하고, 정상적인 여·수신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극약 처방인 셈이다. 주식시장의 투자자뿐 아니라 경제학자들도 이번 구제공조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번 대책으로 급한 불을 진화하고 금융시장의 기능을 상당 부분 정상화시킬 것이라는 각국 정부의 희망과 달리 오히려 금융회사의 부실에 정부마저 말려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는다 해도 일이 꼬일 여지는 또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금융회사가 부실을 걷어내기만 할 뿐 여신활동에 소극적일 경우 신용경색이 완전히 풀리기는 힘들다. 더 큰 문제는 실물경기가 금융업계에 미칠 영향이다. 부동산 가격 하락이 신용위기를 일으켰고, 여기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실물경기를 압박하고 실물경기 침체는 다시 금융 부문의 부실을 양산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 벼랑 끝에 몰린 금융회사에 아무리 막대한 자금줄을 대준다 해도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부실이 추가로 발생할 수 있고, 이 경우 유동성 지원이 추가로 단행돼야 한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구제공조도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부실 금융회사가 완전히 클린화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얼어붙은 자금시장에서 다시 돈이 돌기 위해서는 추가 부실이 없다는 시장의 신뢰가 싹터야 하고,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더 이상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번져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야 한다. 이번 위기의 진원지인 신용부터 실물까지 시장은 아직 많은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메인스트리트

‘S→R→D’ 연초까지만 해도 물가가 오르면서 성장은 둔화되는 이른바 ‘S(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시장의 최대 화두였다. 이내 일부 경제학자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R(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고백이 이어졌고, 이제 ‘D(디플레이션)’로 치닫고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투자가들 사이에 세계 경기가 ‘L’자형의 침체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시되고 있지만 ‘D’는 불가피한 수순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번 위기를 보다 큰 그림에서 보면, 비우량 등급 부동산 대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파생상품 시장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소비와 생산, 투자 등 세 가지 부문의 과잉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기간에 걸친 신용 팽창도 바로 이 세 가지 과잉을 근간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실물경기 악화를 계기로 과잉에 따른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표출, 경기 수축 과정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며 이 과정에 위기의 원흉인 미국은 물론이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까지 경기 후퇴를 피해가기 힘들다는 얘기다.

지구촌을 강타한 ‘위기’라는 드라마가 완전히 막을 내리고 경기가 다시 확장하는 선순환을 그리기 위해서는 금융회사의 부실 해소는 물론이고 얼어붙은 소비와 기업의 생산이 다시 활기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글로벌 경기가 이 같은 선순환으로 돌아서기까지는 결코 짧지 않은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투자가들의 경고다.

우선 경기 수축 과정에 각종 가격의 하락이 불가피하다. 천정부지로 치솟다 이미 급락 중인 원자재는 물론이고 주택 가격과 임금까지 실물경기의 확장 과정에 나타났던 인플레이션이 먼저 해소돼야 한다는 얘기다. 부동산 가격과 주가 하락으로 인한 ‘자산 역효과’는 소비를 더욱 위축시키고, 이는 다시 기업의 재고 증가와 투자 감소, 고용 악화로 이어진다. 일자리가 줄어들면 결국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며, 실물경기를 더 얼어붙게 하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글로벌 경기가 급속한 회복이 아닌 ‘L자’ 형의 장기적인 침체로 흐를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 같은 논리가 깔려 있다.

실물경기가 악화 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부실 규모를 보다 투명하게 드러낸 금융회사가 자본을 확충해 정상적인 신용 창출 기능을 회복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또 중국을 포함한 성장 동력을 가진 이머징 국가들이 인플레이션 압력이 축소된 틈을 타 경기 부양 정책을 펼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머징 국가를 필두로 경제 성장 엔진이 재가동되면서 선진국도 마침내 회복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이다.

국제적인 구제공조로 주식시장이 단기적인 안도랠리를 보이자 성급한 이들은 ‘이제 바닥’이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2부 능선까지 왔을 뿐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가 적지 않고, 눈앞에 펼쳐질 길은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멈춰 서 버린 자동차의 시동을 살려 놓긴 했지만 앞으로 달려야 할 길이 반듯하게 닦인 고속도로가 아니라는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