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메타버스·로봇·AI 같은 또 다른 비용 감소 요인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과도기에 있다. 사진 셔터스톡
우리는 메타버스·로봇·AI 같은 또 다른 비용 감소 요인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과도기에 있다. 사진 셔터스톡
이경수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 현 한국은행 외환자산운용위원회 외부위원, 투자전략 부문 최다 베스트 애널리스트 수상
이경수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
현 한국은행 외환자산운용위원회 외부위원, 투자전략 부문 최다 베스트 애널리스트 수상

‘Emerging(이머징·신흥국)’ ‘BRICs(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모두 2000년대 무역 시대를 상징했던 말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공급망이 빠르게 재편되자 거대한 경제권역이 탄생했다.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성장 잠재력은 이들이 중심이 된 배경이었다. 자연스럽게 투자 중심도 이곳에 맞춰졌다. 운송·인프라(기반시설) 등 이 국가들의 성장과 맞닿아 있는 산업은 시장에서 주도 주가 됐다. 2000년 초부터 2008년 금융위기 전후까지 시장을 관통했던 트렌드였다. 당시 ‘중국’이라는 단어는 곧 ‘성장’을 뜻하곤 했다.

지금은 무역이 아닌 ‘플랫폼’이라는 단어가 성장을 대변한다. 아마존을 비롯해 온라인을 통한 사람과 연결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침투 속도도 매우 빠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결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차가 크게 줄어든 덕이다. 온라인 공급망의 탄생인 것이다. 온라인 플랫폼이 기반이다 보니 산업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혁신만 있다면 다른 산업 분야를 빠르게 흡수해 나갈 수 있다. 이미 우리가 하루 24시간 내내 이 기업들의 플랫폼에 노출된 이유이기도 하다.

공급망 변화는 혁신적인 ‘비용 절감’과 ‘새로운 시장’ 창출(개척)이 맞닿을 때 빨라진다. 과거 중국은 저렴한 인건비와 풍부한 노동력으로 글로벌 기업의 생산 기지 이전 욕구를 자극했다. 중국의 거대한 시장은 도전의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온라인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와 직접 연결돼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또 플랫폼의 성장으로 온라인에 연결된 전 세계 모든 소비자가 고객이 될 수 있는 시장이 열렸다. 혁신 요소와 대상만 다를 뿐 패턴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변화의 기폭제는 기술이다. 비단 중국과 플랫폼 혁명뿐만 아니라 역대 공급망의 변곡점은 기술 진화와 관련 있다. 경제학자인 리처드 볼드윈 스위스 제네바대 국제경제대학원(GIIDS) 교수는 교역(운송) 비용과 커뮤니케이션(통신) 비용 감소가 공급망 변화를 자극해 왔다고 주장한다.


선진국에서 이머징 시장으로 그리고 또 다른 변곡점으로

과거 자급자족 경제 시대에는 생산과 소비가 한 지역에서만 이뤄졌지만, 배·기차·자동차 등 이동 수단 발달은 운송 비용을 줄였다. 이는 곧 무역 활성화로 연결됐다. 생산과 소비가 처음으로 분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초기 무역의 주도권을 지금의 G7(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일본) 국가가 잡고 성장한 국면이므로 역사는 1990년까지의 이 시기를 ‘대(大)발산의 시대(The Great Divergence)’라고 부른다.

2000년대 전후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은 또 다른 변곡점으로 연결됐다. 과거 철도·자동차 등 이동 수단 발달이 운송 비용을 낮췄다면 PC·인터넷 등 ICT는 서로 다른 국가 간의 의사소통 비용을 절감시켰다. 보다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을 조종(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와 신흥국을 중심으로 생산 기지를 빠르게 확충한 것도 이때부터다. 선진국(설계·관리)과 신흥국(생산·제조)이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고, 생산 과정의 분리가 진행됐다. 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글로벌 공급망(GVC) 탄생이기도 하다.

그 결과 아시아와 신흥국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했고 선진국 국내총생산(GDP)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전 세계 부(富)가 재배분됐다. 1988년 기준 전 세계 GDP 내 G7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67%에 육박했지만 2010년에는 50%까지 하락했다. 앞서 운송 비용 절감이 G7 중심의 대발산 시대를 열었다면, 커뮤니케이션 비용 감소로 야기된 이 시기는 신흥국의 추격을 뜻하는 ‘대수렴의 시대(The Great Convergence·1991~2009)’로 불린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변곡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2010년 이후 플랫폼 산업 중심의 재편에 이어, 메타버스·로봇·인공지능(AI) 같은 또 다른 비용 감소 요인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드윈 교수는 우리가 또 다른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공급망이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대면 비용(Face to Face Cost)’ 감소다. 물리적인 공간 제약이 없기에 한 사무실에서 서로 다른 국적의 회사에 근무하거나, 로봇과 AI로 인해 노동 서비스가 노동자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필자는 휴먼(Human·사람) 비용이라 칭하고 싶다. 향후 어떤 형태로 새로운 공급망 형태가 전개될 것인지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기회가 이 산업들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련 기술 경쟁력이 있는 국가를 중심으로 공급망이 재편 혹은 양분화하는 ‘또 다른 전환기(The New Divergence)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많은 이유다.


공급망 변화는 현재 진행 중, 기술과 무형자산이 핵심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공급망 변화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플랫폼 기업이 빠르게 성장했던 2015년 이후 자국 내 공급망 변화가 수반됐다. 국가별 수입 비중이 대표적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비중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으로부터의 수입 비중은 빠르게 늘고 있다. 한국과 대만으로부터의 수입 비중도 다시 증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미·중 간 무역 갈등을 떠나 이미 산업 변화에 따른 공급망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앞으로 산업 연계성이 높은 국가는 더 밀접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시사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높은 제조업 비중과 높은 중국 의존도로 표현되는 국가이지만 이런 고정관념이 곧 바뀔 듯하다. 한국 GDP 내 제조업(27.1%) 비중은 비제조업(26.5%) 비중과 역전을 눈앞에 두고 있을 정도다. 비제조업 분야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얘기다. 또 한국의 국가별 수출 비중을 보면 중국 향 수출은 2010년 이후 지금까지 25% 수준에서 정체되고 있지만, 미국과 아세안향 수출은 중국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중국보다는 미국 공급망 의존도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투자 전략은 명확하다. 지금이 또 다른 공급망 재편기라면 새로운 공급망 재편에 따른 투자 전략이 필요하다. 필자는 미국 중심의 ‘기술 공급망’과 ‘무형자산 공급망’이 핵심이라고 본다. 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산업(이차전지·반도체 등)이 결국 주도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소프트웨어·엔터테인먼트·게임 산업 내에서 독보적인 무형자산 경쟁력을 갖춘 기업은 결국 새로운 공급망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 철저히 그 기술 공급망에 속해 있거나 주도할 수 있는 기업에 집중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당장 2021년 말과 2022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