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곧 승낙이다”

그는 4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홀몸으로 3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다 강원도 홍천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이것저것 돈 될 만한 일에 기웃거려 봤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82년 10월,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삼성생명의 한 영업소에 들러 강의를 듣게 된 것이 계기가 돼 FC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밟아보는 서울 땅이 두려웠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에 과연 FC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 당시 FC로 출발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80% 이상이 중도에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었다. 김씨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서울 시내를 샅샅이 훑고 다녔지만 생각만큼 실적이 좋지는 않았다. 그는 아침 일찍 가게 앞에 있다가 주인이 문을 여는 틈을 이용해 인사하며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매번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개시도 안 했는데 재수 없게 보험 가입하라고 한다며 소금세례도 밥 먹듯이 이어졌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토큰 100개를 주면서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 주던 영업소장의 말에 힘을 얻어 또 한 번 도전하게 됐다.

아픔과 시련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거절은 곧 승낙’이라는 영업 철학을 세워 스스로를 다졌다. 고객들이 거절하면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달렸다. 이런 끈기와 열정 덕에 김씨는 설계사 활동을 하면서 받은 상만도 100개가 넘는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김씨의 정성에 마음을 움직인 고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50년째 설렁탕집을 운영하고 있는 고객 안모씨(85)도 김씨에게 소금 세례를 했던 이들 중 한 명이다. 결국 김씨의 성실함에 감복한 안씨는 이후에 자신은 물론이고 손자 30여 명의 보험까지 가입,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이렇게 김씨를 통해 삼성생명과 인연을 맺은 고객은 3000여 명에 달한다. 그가 거둔 수입보험료는 어림잡아 500억원 정도다.

화초 키우듯 고객에게 정성을 다해

김씨의 장수비결은 특유의 고객관리 철학 때문이다. 그는 고객을 화초에 비유한다. “똑같은 화초라도 정성을 들인 화초는 잘 자라지만, 그렇지 않은 화초는 금방 시든다”고 말했다. 고객도 화초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객들에게 특별적립상품을 통해 ‘내 집 마련’할 기회를 안겨주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특별적립상품 5년짜리를 계약하면 약 3500만원가량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 금액이면 서울에서 아파트 99.18㎡형 한 채는 어렵지 않게 구입할 있었다. 이 상품으로 아파트를 마련하게 된 고객만도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소개하는 ‘80년대 리쿠르팅 풍속’도 현재는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는 사람의 집을 빌려서 동네 아줌마들을 모은 뒤 지점장이 후보자들을 교육시키는 동안 그는 한쪽 방에서 애들을 돌봤다. 요즘처럼 육아시설이 전무했던 시절이라 리쿠르팅에 육아 문제가 가장 큰 곤란거리였던 것이다. 그만큼 리쿠르팅이 어려웠지만 그는 64명을 등록시켰다. 이런 열정을 가졌기에 아름다운 은퇴가 가능한 것은 아닐까.

광진지점에서 김씨는 ‘김 고문(顧問)’으로 통했다. 풍부한 지식과 경험으로 후배 설계사 및 지점 직원들을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이 영원한 고향이라는 김씨. 비록 은퇴했지만 그의 영업 정신은 후배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