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아세안 10개국이 세계 최대 규모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서명했다. 사진 EPA연합
11월 15일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아세안 10개국이 세계 최대 규모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서명했다. 사진 EPA연합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11월 15일 참가국 정상들이 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및 아세안(ASEAN) 10개국 등 15개 협정 참가국 정상들은 이날 화상으로 열린 RCEP 정상회의 및 협정문 서명식에 참석했다. RCEP 참가국의 무역 규모, 인구,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달한다. RCEP를 세계 최대 규모의 FTA라고 하는 이유다.

RCEP는 가맹국 사이에 관세 문턱을 낮추고 체계적인 무역·투자 시스템을 확립해 교역을 활성화한다는 목적으로 출범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로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는 우리 업체의 경우 현재 최고 40%의 관세를 감당해야 하지만, RCEP가 발효된 후로는 관세가 최저 0%까지 줄어든다. 가입국 간 원산지 기준을 동일화해 기업이 FTA 혜택을 볼 수 있고, 지식재산권 보호와 경제 기술 협력 등 여러 방면에서 이득이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의 발언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세계적 위기 속에도 거대 경제 공동체를 출범시켜 보호무역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렸다”며 “RCEP로 상호 협력을 촉진해 코로나19 위기를 함께 극복하자”고 했다.

참가국 정상들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무역 투자 시스템 구축을 위해 이번 협정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는 내용을 담은 공동 성명도 채택했다. 정상들은 RCEP가 조기에 발효될 수 있도록 각국이 국회 비준 등 국내 절차를 조속히 추진하자는 데에도 공감대를 이뤘다. 청와대는 “경제 협력 강화, 한국 산업의 고도화 등을 모색해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정책 가속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RCEP 협정문 서명에 앞서 참가국들은 2012년 11월 협상 개시를 선언한 이후 8년간 31차례 공식협상, 19차례 장관회의, 4차례 정상회의를 진행했다. 올해 코로나19 상황에도 10여 차례 화상회의를 열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며 미국과 아시아·태평양의 경제 협력이 느슨해진 사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중국이 주도적으로 밀어붙여 8년 만에 서명에 이르게 됐다.

당초 RCEP 협상에 참여한 인도는 대(對)중국 무역 적자 확대를 우려해 지난해 불참을 선언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의 조 바이든 차기 행정부가 RCEP 체결을 계기로 TPP에 복귀해 중국을 견제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출범을 앞둔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취임 이후 새로운 무역협정은 검토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당장 코로나19 대응과 국내 경제 회복에 전력을 다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 의회에서도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도 외국에 일자리를 내줬다며 TPP에 부정적인 상황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블룸버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1
아시아에서 영향력 확대한 中

우선 RCEP 체결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1월 16일(현지시각) 국제 무역 전문가들을 인용해 “RCEP 체결로 아·태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RCEP는 중국이 참여한 최초의 다자간 FTA다. SCMP는 RCEP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경제 혼란과 미·중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체결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조 바이든 차기 미 행정부가 아·태 지역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아직은 모호한 가운데 RCEP가 체결된 것은 중국이 이 지역 국가들과 경제 협력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국 런민대 국제학부는 소셜미디어(SNS) 위챗에 게재한 논평에서 “2016년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출범한 이래 ‘중국 최대의 외교적 승리’”라고 환호했다. 다만 SCMP는 바이든 행정부가 일본 등 우방국을 상대로 RCEP 탈퇴를 로비할 경우 향후 RCEP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 사진 블룸버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2
고민 깊어진 바이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1월 16일(현지시각) 미국 델라웨어에서 열린 경제 정책 방향 기자회견에서 중국 주도로 체결된 RCEP 가입을 검토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외국과의 협상이 필요한 협정 가입 여부를 인수인계 기간에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면서도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제휴해야 중국과의 (국제 무역) 규칙을 설정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 견제를 위한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바이든이 “미국 제조업에 의미 있는 투자가 이뤄질 때까지 새로운 무역협정은 체결하지 않겠다”고 공약했지만, 일본 등 동맹국은 미국이 TPP에 재가입해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견제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TPP 등 무역협정을 야심 차게 추진했다가 러스트벨트(제조업의 사양화 등으로 불황을 맞은 지역)의 표를 잃은 경험을 한 민주당은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내세우고 있다. 당장 2022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려면 미국 경제 살리기에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울산 항만에 현대차의 신차가 정렬해 있다. 사진 블룸버그
울산 항만에 현대차의 신차가 정렬해 있다.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3
최대 수혜국 日도 우려

RCEP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자동차를 비롯한 국내 산업계는 글로벌 시장 확대에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는 논평을 내놨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RCEP 최대 수혜국은 일본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일본은 RCEP 체결국 가운데 중국, 한국 모두와 양자 FTA를 맺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다른 체결국은 두 국가 모두, 혹은 적어도 한 국가와는 FTA를 체결했다. RCEP로 인한 공업품 관세철폐율이 91.5%로 일본 주도의 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비해 낮다고 해도 일본으로서는 최대 무역 상대국인 두 나라와 무역 협상의 길을 텄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우려감도 나온다. 산케이신문은 11월 16일 “RCEP가 일본 경제에 분명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지만, 아·태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하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감이 나오고 있다. 바이든이 TPP 재가입을 선언하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