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속도를 내며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이어 4월 12일(이하 현지시각) 화상으로 글로벌 반도체·자동차·IT 기업 19곳의 경영진을 불러모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글로벌 화상 반도체 대책회의’에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어떻게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을 강화할 것인지 말하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 경쟁력은 (회의에 참석한) 당신들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이 글로벌 기업에 자국 반도체 생산 확대를 위한 투자를 직접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대만 등에 의존하던 반도체 생산 구조를 미국 중심으로 새롭게 구축한다는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제조업의 기반 산업이며,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 신산업 발전에 필요한 핵심 부품이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갖고 있지만,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 내 생산 비율은 1990년 37%에서 2020년 12%까지 줄었다고 보스턴컨설팅그룹이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주문에 호응하듯 미국의 인텔은 철수했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재진출을 최근 선언한 데 이어 해외에 의존하던 차량용 반도체 생산에도 뛰어들겠다고 이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이미 미국 인프라 투자와도 연결 지었다. 그는 3월 일자리 창출을 위한 2조3000억달러(약 2500조원)의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산업 강화 예산 500억달러(약 57조원)도 포함했다.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소재에 대한 공급망을 점검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칩, 웨이퍼와 배터리, 초고속 데이터 통신망 이런 것들이 모두 인프라”라며 “과거의 인프라를 수리할 게 아니라 오늘날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핵심적으로 필요한 것에서 다시는 다른 나라의 자비에 의존하지 않게 미국의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며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미국을 재건하고, 미국의 제조업을 재활성하며, 미국의 연구개발(R&D)이 다시 위대한 엔진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의 테크 굴기(崛起)에 대한 견제도 또다시 드러냈다. 그는 “23명의 상원의원과 42명의 하원의원에게서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공격적 계획을 갖고 있다’는 서한을 받았다”며 “미국은 20세기 세계를 주도했고 21세기에도 다시 세계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에릭 쉬 화웨이 순환 회장. 사진 화웨이
에릭 쉬 화웨이 순환 회장. 사진 화웨이

연결 포인트 1
중국 즉각 반발 “중국 성장 가로막는 정치 공작”

중국이 미국의 ‘글로벌 화상 반도체 대책회의’에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 관영 매체 ‘환구시보’의 영문판 ‘글로벌타임스’는 4월 12일 “(미국의 반도체 회의는) 중국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정치 공작”이라고 폄하했다. 이 매체는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관련 기업들을 불러 모은 회의에 중국 기업들을 배제했고 미국 의회도 중국을 겨냥한 제재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미국은 반도체를 중국의 기술 발전을 억제하는 무기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글로벌타임스는 이어 “미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동맹국들에 중국과 척을 지라고 압박하는 것도 결국 미국이 (중국과 경쟁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며 “대만 TSMC와 삼성전자 같은 동맹국 기업에 무리하게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에릭 쉬 화웨이 순환 회장도 같은 날 중국 선전에서 열린 화웨이 애널리스트 서밋에서 “미국이 중국 기술 기업에 부여한 규제 때문에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사진 EPA연합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사진 EPA연합

연결 포인트 2
유럽, 반도체 패권 전쟁 가세 메르켈 독일 총리 “5조원 투자”

유럽도 반도체 공급망 강화에 나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4월 12일 열린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하노버메세 2021)’에서 36억유로(약 4조8960억원) 규모의 시스템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미국에 뒤처진 유럽의 시스템 반도체 기술 강화와 기술 독립을 위한 투자”라며 “10억유로는 독일 정부가, 26억유로는 유럽연합(EU)의 27개 기업이 투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 위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전체적인 디지털 기술과 역량을 강화하고 중요 인프라의 원자재, 제품, 기술 분야에서 유럽이 독립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아가 메르켈 총리는 데이터 수집부터 저장, 분석까지 통제할 수 있는 ‘데이터 주권’ 확보도 강조했다.

앞서 EU는 3월 10%를 밑도는 유럽의 세계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2030년 20%로 높이고 자율주행차 등에 활용하는 ‘디지털 전환 로드맵’을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 삼성전자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 삼성전자

연결 포인트 3
삼성전자, 미·중 ‘샌드위치’ 지정학적 리스크에 투자 부담

삼성전자가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투자 요청을 받으면서 지정학적 셈법이 복잡해졌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고, 20조원 규모의 생산라인을 추가로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에 화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으로의 첨단 반도체 장비 반입을 억제할 것으로 알려져 삼성전자가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낸드플래시와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가동 중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2공장 증설을 진행하고 있고, 이 공장이 예정대로 가동되면 올해 중순부터 월 13만 장의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삼성전자가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낸드플래시의 40%에 해당한다. 업계에선 충분한 생산 능력을 갖췄다고 보지만, 중국 정부의 추가 투자 압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용선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