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나베 슈쿠로 프린스턴대 교수. 사진 EPA연합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나베 슈쿠로 프린스턴대 교수. 사진 EPA연합
최인한 시사일본연구소 소장 현 경희사이버대 일본학과 강사, 전 한국경제신문 온라인총괄 부국장
최인한 시사일본연구소 소장
현 경희사이버대 일본학과 강사, 전 한국경제신문 온라인총괄 부국장

매년 10월이 되면 세계 각국은 노벨상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10월 10일 노벨경제학상 발표를 끝으로 2021년도 노벨상 시즌이 마무리됐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올해도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릴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디지털과 4차 산업에서 낙후됐다고 알려진 일본은 노벨상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다.

일본인인 마나베 슈쿠로(90)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일본은 노벨과학상 수상자 수에서 2000년 이후 기준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 일본이 꾸준히 노벨상을 받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일본인과 일본 사회의 특성을 분석한다.

노벨상은 스웨덴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기부한 재산을 바탕으로 인류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1901년 제정 이후 6개 시상 부문 가운데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등 과학상이 3개에 달할 정도로 기초 과학을 중시한다. 마나베 교수는 독일의 클라우스 하셀만, 이탈리아의 조르조 파리시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프린스턴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 중인 마나베는 44세 때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마나베는 일본 에히메현 출신으로 도쿄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해양대기국에서 연구했다. 그는 대기와 해양을 결합한 물질의 순환 모델을 제시했다. 이산화탄소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밝혀 지구 온난화 연구의 근간이 되는 성과를 냈다는 평가다. 그는 1989년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대기와 해양을 결합한 물질의 순환 모델을 활용, 온실가스 배출량이 연간 1%씩 늘어나면 북반구 고위도 지역에서 온난화가 진행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본인의 노벨상 수상은 이번이 28명째다. 일본인의 물리학상 수상은 12명째다. 2015년 중성미자 진동 실험으로 중성미자에 질량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가지타 다카아키에 이어 6년 만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는 물리학상이 12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화학상 8명, 생리의학상 5명, 문학상 2명, 평화상 1명 순이다.


정주형(定住型) 일본 사회, 한 우물 파야 하는 노벨과학상에 유리

섬나라인 일본은 지리적으로 정주형(定住型) 사회다. 외부에 폐쇄적이지만 내부 구성원 간 신뢰가 높고 사회가 안정된 특성이 있다. 중세의 오랜 기간 봉건제가 실시돼 자생적인 자본주의 발전 토대도 만들어졌다. 지배층인 사무라이 계급과 평민층의 역할 분담이 뚜렷했고, 대를 이어 한 분야에 종사하는 직업 세습의 전통이 굳어졌다. 중소 제조업이나 자영업은 물론 대학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에서도 가업을 잇는 일본인이 많은 배경이다. 일본 사회는 외부의 큰 충격이 없으면 잘 바뀌지 않는 단점이 있지만, 연구나 제조 등 한 분야를 파고들기에 좋은 풍토를 갖췄다는 게 다수 일본학 학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100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1603년 출범한 도쿠가와 막부 아래 지방 분권제가 뿌리내렸다. 지역 영주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자신의 영지에서 각종 산업을 장려했고, 그 덕분에 기술과 제조업이 발전하는 토양이 갖춰졌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서양의 학문, 기술, 사회 시스템도 빠르게 도입했다. 당시 사상가이며 교육자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을 따라잡기 위한 ‘실학’을 매우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실학은 ‘과학(science)’으로 서양의 기술, 의학 등을 뜻했다. 일본의 선각자들은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국가가 되자)’를 내세워 ‘일본의 서양화’를 이끌었고, 서구식 합리적 정신과 사회 시스템을 적극 도입했다. 일본인 특유의 높은 교육열도 서구식 제도와 산업을 빠르게 정착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노벨과학상 휩쓰는 도쿄대와 교토대

학문 연구의 요람이 되는 일본의 서구식 대학 역사는 꽤 길다. 1886년 공포된 제국대학령에 따라 국내 7곳에 제국대학이 설립됐다. 지금도 일본 대표 명문으로 꼽히는 도쿄, 교토,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오사카, 나고야 국립대학의 뿌리다. 메이지정부 시절 일본 천왕(일왕)은 도쿄대와 교토대의 졸업식에 직접 참석, 수석 졸업자에게 메달을 수여할 정도로 대학 육성에 힘을 쏟았다. 동부 지역을 대표하는 도쿄대와 서부를 대표하는 교토대의 ‘일본 최고 대학’ 경쟁은 그만큼 치열하기도 하다.

도쿄대와 교토대 간 자존심 대결은 오랜 역사에서 기인한다. 간사이(일본 서부) 사람들은 중세시대 1000년 이상 수도였던 교토의 ‘교토대’를 최고로 내세운다. 이런 주장의 밑 바닥에는 동서(東西) 간 지역 감정이 깔려있다. 100여 년의 대혼란기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 근거지가 에도(江戶·도쿄의 옛 이름)였기 때문이다. 그는 동부 지역 영주들을 이끌고 오사카성에 자리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멸망시켰다. 

이들 두 대학은 노벨상 수상자 수에서도 각축전을 벌인다. 올해는 도쿄대의 승리였다. 마나베 슈쿠로는 도쿄대 이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대 대학원 이공계 연구과를 수료했다. 도쿄대 출신 노벨상 수상자는 9명으로 늘어나 교토대보다 한 명 앞서게 됐다. 지난 2019년, 일본인으로 24번째 노벨과학상 영예를 안은 요시노 아키라는 교토대 공학부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전국에 분포한 이공계 명문 국립대학이 노벨상 수상 토대

일본에는 이공계가 강한 국립대학이 전국에 고르게 분포돼 있다. 일본이 30여 년의 장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세계 3위 경제력을 유지하고, 노벨상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는 것도 이공계 명문대가 많은 덕분이다. 노벨상 배출자는 도쿄대(9명), 교토대(8명), 나고야대(3명) 홋카이도대(1명) 도호쿠대(1명)순이다. 오사카대도 박사 학위 기준 2명의 노벨 수상자를 냈다. 이들 대학 외에 도쿄공업대, 도쿠시마대, 사이타마대, 야마나시대, 고베대, 나가사키대도 1명씩을 배출했다. 노벨상 수상 동문(학부 기준)이 있는 일본 대학은 모두 11개에 달한다. 도쿄대와 도쿄공대를 제외한 9곳이 도쿄가 아닌 지방에 있다.

대학 랭킹 평가에서도 이공계가 강한 대학들의 순위가 높다. 영국 ‘타임즈고등교육(THE)’이 공표하는 일본 대학 종합 랭킹(2020년 기준)에 따르면, 이공계 명문으로 꼽히는 도호쿠대가 1위를 차지했다. 교토대 2위, 도쿄대와 도쿄공대가 공동 3위였다. 규슈대, 홋카이도대, 나고야대, 오사카대, 쓰쿠바대, 국제교양대순으로 상위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흔히 일본에서 최상위권(SA)으로 꼽히는 대학은 국립대 11개, 사립대 3개 등 14개다. 도쿄대, 교토대, 히토쓰바시대, 도쿄공대, 도호쿠대, 오사카대, 나고야대, 고베대, 규슈대, 홋카이도대, 요코하마국립대 등이 국립이다. 게이오대, 와세다대, 주오대 등 3개 사립대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노벨상은 기초 과학과 기술에 대한 국제 사회의 객관적인 잣대라고 볼 수 있다. 기초 과학이 튼튼해야 새로운 산업이 계속 창출되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 기초 과학과 기초 제조업(소재·부품·장비)은 짧은 기간에 세계적 수준으로 오르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축적된 자본과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경제 개발을 시작으로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과학 연구를 시작했다. 꾸준히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고 있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제적 평판도가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경제, 군사, 문화, 의료 등 여러 방면에서 대한민국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노벨상에서도 결실을 볼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