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36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마르코스 주니어(사진 왼쪽) 당선인과 부통령으로 선출된 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사진 EPA연합
필리핀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36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마르코스 주니어(사진 왼쪽) 당선인과 부통령으로 선출된 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사진 EPA연합

‘독재자 자녀들의 귀환’, 5월 9일(현지시각) 치러진 필리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놓고 외신들은 앞다퉈 이렇게 보도했다. ‘필리핀 최악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이 대통령으로, ‘철권 통치’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시(市) 시장이 부통령으로 당선됐기 때문이다.

필리핀 국내외에서는 필리핀 유권자들이 독재자의 아들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 놀라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 당선인의 아버지인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86년 축출될 때까지 21년간 대통령 자리를 지켰다. 재임 동안 그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야당 인사와 언론인, 국민을 잡아 가뒀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마르코스 전 대통령 집권기 중 계엄령이 발효됐던 9년 동안 약 7만 명이 ‘국가의 적’으로 체포됐고, 이 중 절반가량이 고문당했으며,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퍼스트레이디 이멜다의 측근 비리와 사치도 국가적 문제였다. 이멜다가 국고에서 횡령한 금액은 100억달러(약 12조7450억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폭정과 비리를 일삼던 대통령 부부는 1986년 일어난 민주화 혁명으로 권력을 잃고 하와이로 망명했고,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89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마르코스 대통령 당선인은 절대 권력을 누린 대통령의 외아들답게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23세 때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북일로코스 주(州) 부주지사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1986년 민주화 혁명 당시 가족들과 함께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 뒤 1991년 북일로코스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한 그는 상·하원을 거쳐 아버지가 축출된 지 36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됐다.

전문가들은 마르코스 당선인이 뽑힌 이유가 역사 왜곡과 허위 정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대선 당시 마르코스 당선인 진영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겸 필리핀을 번영으로 이끈 위인으로 미화했다. 그가 당선되면 마르코스 일가가 소유한 엄청난 재산을 국민에게 분배할 것이라는 가짜 뉴스도 떠돌았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집권기를 경험한 필리핀 국민은 새 대통령 역시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고 벌써 우려하고 있다. 과거에 저질러진 온갖 비리에 대한 정의 구현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마르코스 가문 비리를 조사하는 ‘바른정부위원회(PCGG)’ 인사권을 대통령이 가지기 때문이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중국계 혈통인 마르코스 당선인이 집권하면 필리핀의 전통적인 친중 노선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 외교협회(Council of Foreign Relations)의 조슈아 컬랜칙(Joshua Kurlantzick)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마르코스 당선인은 대선 당시부터 친중 노선을 밝혔지만, 현재 필리핀에는 남중국해 분쟁 등으로 인해 반중 정서가 확산한 상황”이라면서 “중국과의 관계 설정은 마르코스 당선인의 가장 큰 외교 이슈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필리핀 대선에서 마르코스 당선인이 승리한 일등 공신으로 꼽히는 소셜미디어. 사진 로이터연합
필리핀 대선에서 마르코스 당선인이 승리한 일등 공신으로 꼽히는 소셜미디어. 사진 로이터연합

연결 포인트 1
당선의 일등 공신 소셜미디어

많은 전문가는 마르코스 당선인의 승리 요인으로 소셜미디어(SNS)를 활용한 정치 선동을 꼽는다. 당선인은 아버지를 ‘정치 천재’라고 부르며 마르코스 전 대통령 집권 시절을 미화했다. 그 당시가 필리핀의 황금기였으며, 이 시기에 고문 등 인권 유린이 행해졌다는 주장은 모함이라는 내용을 틱톡과 유튜브 등 젊은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SNS를 통해 유포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와 민주화 혁명을 직접 겪지 못한 젊은층은 SNS를 통해 접한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대선 유권자의 52%가 40세 이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미 2016년 대선 때 조직적인 온라인 증오 캠페인을 통해 온라인 환경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마르코스 당선인은 ‘가짜 뉴스의 천국’이 된 플랫폼의 수혜자”라고 분석했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당선인. 사진 로이터뉴스1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당선인. 사진 로이터뉴스1

연결 포인트 2
부통령이 된 또 다른 독재자의 딸

부통령으로 당선된 사라 두테르테 시장은 마르코스 대선 캠페인의 ‘비밀 병기’였다. 애초 두테르테 시장은 현직 대통령인 아버지의 뒤를 이을 대선 후보로 손꼽혔다. 작년 10월 대선 후보 등록이 시작되기 전 실시한 각종 여론 조사에서 두테르테 시장은 마르코스 당선인을 제치고 지지율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 두테르테 시장은 마르코스 당선인의 러닝메이트로 나오겠다고 선언했다.

두테르테 시장과 손잡은 덕분에 마르코스 당선인은 현직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과 기반을 토대로 빠르게 지지층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둘이 러닝메이트 선언을 한 직후, 여론 조사기관 ‘펄스 아시아’가 실시한 조사에서 마르코스의 지지율은 60%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대선 후보로도 거론됐던 두테르테 시장이 단순히 이인자 역할에 그치지 않고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또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나와 딸과 경쟁을 펼치는 것을 검토했을 정도로 정계에 미련이 많기 때문에 딸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팽배하다.

2010년 필리핀 마닐라의 한 호텔에 투숙할 당시의 이멜다. 사진 로이터뉴스1
2010년 필리핀 마닐라의 한 호텔에 투숙할 당시의 이멜다. 사진 로이터뉴스1

연결 포인트 3
‘사치의 여왕’에서 ‘대통령 어머니’ 된 이멜다

AFP통신에 따르면, 대선일인 5월 9일 이멜다 마르코스는 필리핀 북일로코스 주의 한 투표소에 흰색 밴을 타고 나타났다. 92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상·하의를 온통 화려한 붉은색 정장으로 차려입고, 손목시계와 안경까지 붉은 색으로 통일한 모습이었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이멜다’에선 이멜다가 8년 동안 매일 구두를 갈아 신었으며, 하루도 같은 구두를 신은 적이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 부부가 하와이로 망명을 갔을 때 부부가 살았던 대통령궁 지하 방에는 1200켤레가 넘는 구두와 명품 브랜드 옷, 핸드백 등이 수없이 발견됐다. 

일각에선 ‘사치의 여왕’에서 대통령의 어머니가 돼 돌아온 이멜다가 의정 경험을 살려 수렴청정 방식으로 국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마르코스 당선인은 최근 CNN필리핀과 인터뷰에서 “내가 결정해서 대선 후보에 등록했지만, 어머니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바 있다.

오윤희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