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세일'에 물물교환까지 등장

 ‘스토 프로첸트 스키드키(100% 세일)’, ‘수마셰드시이 스키드키(미친 세일)’. 올해 들어 러시아 모스크바의 일부 상점에 등장한 광고 문구다. 작년 10월부터 본격화한 금융위기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경제상식상 100% 할인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어 3월2일 100% 세일 광고를 붙인 ‘에코니카(Ekonika)’ 매장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광고와는 딴판이었다. 이탈리아 벨루티(Berluti)와 스페인의 파르멘(Parmen) 같은 명품 구두를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70%까지 할인해 판매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100% 세일 광고를 내건 이유는 무엇일까. 판매원 스베틀라나(Svetlana)에게 묻자 “광고가 전혀 틀린 건 아니에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할인율은 품목마다 다르지만 점포 내의 모든 구두를 세일하니 100% 세일이 사실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녀는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 침체로 지갑을 열지 않는 손님들을 끌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고 했다. 5000루블(약 22만5000원) 이상의 구두만 취급하는 점포는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하루 평균 600명 이상의 손님이 찾았지만, 1월부터는 100명 이하로 급속히 줄었다.

러시아 금융위기의 실상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현장, 롬바르드(Lombard·전당포). 모스크바에선 ‘자고 나면 하나씩 생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황 속에서 가장 빛을 보는 업종이다. 러시아 롬바르드연합회에 따르면 작년까지 2800만루블이던 1일 평균 대부액이 3월 들어서는 6000만루블까지 급증했다.

고객들이 롬바르드를 가장 많이 찾는 시점은 주말이다. 전당포를 찾을 정도로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를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3월7일 토요일 오후에 찾은 모스크바 시내 남부 프로프소유즈나야 거리에 있는 롬바르드에는 ‘귀금속, 시계, 카메라 등 무엇이든 가져오면 달러든 루블화든 무조건 현금을 드립니다’라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입구를 철창으로 가린 채 직원과 고객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열려 있는 롬바르드의 모습은 여느 국가의 전당포와 다르지 않다. 이곳을 찾은 드미트리(Dmitri·43)는 자신의 애장품인 가죽코트 2벌을 맡기고 2만루블을 빌렸다.

한때 유통업체 ‘X5 리테일그룹’의 중간관리자였던 그는 작년 12월 회사 측의 3분의 1 감원 조치에 따라 해고됐다. 드미트리는 “1년 전 가죽코트 한 벌당 5만루블을 주고 사 별로 입지도 않은 새 코트나 마찬가지인데 돈이 적은 것 같다”면서도 “그래도 현금을 확보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2만루블의 돈은 러시아인 1인당 평균 임금인 1만5200루블보다 많고, 현재 실업자인 그로서는 큰돈이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롬바르드 중에는 최근 들어 24시간 영업을 하는 점포들도 늘고 있다.

금융위기의 파장은 시민들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다. 기업들은 상황이 더욱 나쁘다.

러시아 남부 타간로크 지역에서 현대자동차 등을 조립해 생산·판매하는 타가즈가 1월 초부터 자사 웹사이트에 ‘우리 회사가 생산한 자동차를 부동산 등 고정자산과 교환할 수 있다’는 광고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금융위기로 수요자들이 현금을 내고 자동차를 사는 경우가 급격히 줄자 자동차 가격에 상응하는 부동산 등과 물물교환을 하겠다는 것이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성행했다가 러시아 경제가 활황이던 2000년부터 사라졌던 바터(barter·물물교환) 거래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경제위기로 건설이 중단된 모스크바 시내의 118층짜리 ‘러시아 타워(Russia Tower)’도 일부가 바터 매물로 나왔다. 또 우랄 산맥 인근의 철강제조업체들은 석탄회사에 이미 생산한 스테인리스강(鋼)을 주고 석탄을 사들이고 있다.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건설업체는 건설비용을 농산물로 받고 있다.

러시아 경제사회연구센터(ECSOC)는 “현재 러시아 경제에서 바터 거래가 차지하는 비율은 3~4%이며, 이런 추세라면 올 하반기쯤엔 10%를 넘을 수 있다”고 예측했다. 물물교환은 소련 붕괴 직후 보리스 옐친(Yeltsin) 전 대통령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유행했던 거래 방식이다.

금융위기의 파장이 러시아 경제 전체를 뒤덮고 있는 현장의 모습들이다. 작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에다 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석유·가스 등 에너지 산업이 수출의 65%, 국내총생산(GDP)의 15%를 넘는 전형적인 에너지 의존형 경제구조다. 지난 해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았던 국제유가가 4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자연 다른 나라보다 더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금융위기 이후 루블화 환율 방어를 위해 정부가 전체 외환보유고의 3분의 1이 넘는 2100억달러를 소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블화 가치는 달러화 대비 40% 이상 하락했다. 6000억달러에 근접했던 외환보유고는 5개월 만에 3869억달러로 감소했다. 러시아 증시의 RTS지수는 고점(高點) 대비 70% 정도 내려앉았다. 인플레이션은 17% 정도를 예상하고 있고, 근로자들의 실질임금도 30% 이상 하락했다. 독일 등 유럽에서 차입을 통해 외형 확대에 치중했던 러시아 대기업들이 유럽 경제가 얼어붙으면서 돈 빌릴 곳을 찾지 못해 파산하는 경우도 증가했다.

그러자 세계 3대 신용평가사 가운데 3월11일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밝힌 무디스를 제외하고, 피치와 스탠다드앤푸어스(S&P)는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낮췄다.

하지만 러시아 경제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을 했던 1998년과 같은 사태를 되풀이할 것이라는 전망은 아직 낮은 편이다. 현재 세계 3위 수준인 외환보유고 외에도 2215억달러에 달하는 안정화 기금과 국부펀드가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Putin) 총리를 비롯한 러시아 지도부가 “올 하반기나 2010년 초에는 러시아 경제가 정상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그 같은 사실을 배경에 깔고 있다.

그러나 유가가 지금처럼 40달러 선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러시아 경제의 우려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차츰 고개를 드는 것 또한 현실이다.

권경복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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