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기업 철수 속 잇단 수주 성공

 “한국 기업들은 특유의 도전정신과 끈기, 아이디어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러시아 최대 투자은행 트로이카 디알로그의 최고경영자 루벤 바르다니안(Vardanian)은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맹활약하는 배경을 이렇게 분석했다. 

러시아에서는 금융 위기 이후 지난해에만 1299억달러 등 지금까지 2000억달러 이상의 외국자본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러시아의 대형 국영기업들은 돈 부족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외국 기업들도 러시아에서 이탈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 본부를 둔 라이파이즌은행과 일본의 미쓰비시자동차 등 러시아에서 사업을 확대하던 외국계 은행과 기업들이 사업을 철수하거나 프로젝트를 잇달아 취소한 게 대표적이다. 마치 러시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1998년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 선언 때를 상기시킬 정도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삼성과 LG, 현대 등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대표기업들의 존재는 굳건하다는 게 러시아 경제인들의 평가다.

가장 눈에 띄는 기업은 현대종합상사.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조선업계의 불황이 극심한 가운데 지난 2월 러시아 볼가발틱(Volga Baltic)으로부터 총 4800만달러 규모의 5000DWT(재화중량톤수:선박이 적재할 수 있는 화물 중량)급 화물운반선 4척을 수주했다. 볼가발틱은 500척 이상의 선박을 운영하는 내륙연안운송의 최대 회사로, 철강과 항만터미널 등의 사업도 벌이는 복합그룹이다. 불과 10개월 전 같은 회사로부터 6척의 화물운반선을 수주한데 이어 또다시 큰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현대종합상사는 특히 이번에 수주한 선박을 직접 건조, 인도할 방침이다. 2005년 지분 80%를 인수해 출범시킨 청도현대조선(옛 중국 링산조선소)에 중소형 선박 건조가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다.

러시아의 전략 산업인 자동차 분야에서 우리 기업의 약진도 눈에 띈다. 4월15일부터 이틀 동안 현대자동차 러시아·CIS(독립국가연합)법인은 모스크바에서 딜러 회의를 개최해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 딜러들이 일본의 도요타와 미쓰비시, 미국의 포드 등 다른 글로벌 자동차 기업에서 속속 이탈하는 가운데 현대자동차는 판매 증가를 위해 딜러들의 단합대회를 연 것. 러시아 전역에 98개였던 딜러숍도 미쓰비시 등에서 빠져 나온 딜러숍을 흡수, 118개로 늘렸다.

현대자동차는 또 i30 등 신차를 내세워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비록 1~2월 자동차 판매대수가 1만5139대로, 전년 동기 대비 54% 감소했다. 하지만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전년 동기보다 오히려 1.1%포인트 늘어났다. 다시 말해 금융 경색으로 인한 불황으로 자동차 수요가 급격히 감소한 것이지, 현대자동차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아닌 만큼 위기를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자는 차원에서 i30를 투입했다.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자동차가 ‘공격형’에 가깝다면, 삼성과 LG는 약간 다른 접근법으로 러시아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기호에 맞는 제품으로 승부수를 띄운 게 주효한 것.

삼성과 LG 모두 러시아 금융위기 이후 판매고가 40%가량 감소했다. 하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휴대전화의 경우 최고급인 스마트폰과 저가폰을 동시에 양산, 유럽 1위, 세계 5위권인 러시아 휴대전화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옴니아(Omnia)’의 러시아판 모델인 ‘위투(Witu)’로, LG전자는 ‘KS660 블랙블루’를 내세웠다. 애플 3G 아이폰이 작년 10월 출시 이후 스마트폰 시장을 싹쓸이했다가 금융 위기의 파장이 본격화한 올 초부터 판매가 급락한 사이, 한국의 두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40% 가까이 치고 올라온 것. 이와 함께 러시아가 빈부 격차가 크다는 사실을 감안, 일반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저가 휴대전화 시장도 함께 공략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이와는 별도로 러시아에서 첫 선을 보여 인기몰이에 성공했던 ‘듀오스(Duos)’의 새 버전을 시장에 내놓았다. 이전 모델보다 가격을 60% 싸게 내놓은 듀오스 C5212모델은 3월 출시 이후 한 달 만에 러시아 전체 휴대전화 히트모델에서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금융위기의 러시아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는 이유는 도전과 개척정신에다 현지화 전략까지 더해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특히 현지화 전략은 다른 나라의 글로벌 기업들과 차별화된다.

2004년부터 외국 수입차 1~3위권을 꾸준히 유지해온 현대자동차의 경우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러시아 소비자들의 마음속을 파고들고 있다. 약 15억원의 기금을 조성, 러시아 대학과의 산학협력과 교통안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2011년부터 교통안전 의식 함양을 위한 어린이 자동차공원을 운영하고 이즈베스티야 등 현지 언론을 통한 자동차 안전 캠페인도 벌이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볼쇼이극장 후원사업 외에 3만5000달러를 들여 러시아 고아원들에 스포츠파크를 건설해주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아울러 러시아 시장에서 텔레비전과 자동차 판매 1위 기업이자 신뢰도가 높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공동 프로모션 행사를 진행, 시너지 효과를 보고 있다. 가령 판매가격 6만달러(약 6600만원)인 산타페를 구입하는 러시아 소비자에게는 판매가 5000달러 상당의 삼성전자 최고급 LCD TV 키노(Kino)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들이 공세를 늦추지 않는 것은 1998년 러시아 디폴트 선언 때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외국 기업들은 물론, 국내 금융기관과 업체들도 러시아에서 대거 철수하거나 영업을 축소했다. 하지만 삼성과 LG, 현대 등은 영업망을 확충하고 마케팅을 강화해 러시아가 위기에서 벗어나 활황세에 접어들 때 시장 지배력에서 다른 외국 글로벌 기업들과 큰 격차를 벌렸다. 한국 기업들의 ‘어게인(Again) 1998’이 러시아 시장을 평정할지 주목되는 이유다.

박근우 현대종합상사 러시아 법인장  

“끈끈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 성공비결”

“화물운반선 10척 수주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더 열심히 뛰어서 러시아 시장에서 신뢰받는 한국 기업의 위상을 보이겠습니다.”

박근우 현대종합상사 러시아 법인장(43)은 1년 사이 총 1억2000만달러 규모의 5000DWT(선박이 적재할 수 있는 화물 중량)급 화물운반선 10척 수주를 이끌어내는 개가를 올렸음에도 인터뷰 내내 무척 겸손했다. 금융위기 속의 러시아에서 그가 커다란 성과를 일궈낸 요인은 무엇일까. 박 법인장은 “시장을 꿰뚫는 정확한 판단과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해답이라고 말했다.

- 화물운반선 10척의 수주를 놓고 러시아에서도 놀랍다는 평가가 많다.

“현대종합상사는 10척의 화물운반선을 1억2000만달러에 수주했다. 이는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1척당 평균단가가 900만달러인 국제 시세보다 30%나 가격을 올려 받은 것이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터키, 중국보다 우리 회사의 신용을 러시아 측이 더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본다.”

- 수주를 이끌어낸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보나.

“우선 기회를 잘 활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2006년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Putin) 대통령은 러시아 조선 산업의 현대화를 강조했다. 그 발언 이후 우리는 러시아 선박 회사들을 일일이 접촉했고, 러시아 회사들이 이미 세계 수준에 진입한 한국 회사들과 협력하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볼가발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당장 10척의 화물운반선 수주에 그치지 않고, 볼가발틱이 철강과 항만터미널 등의 복합 사업을 하는 점을 감안해 일회성 거래가 아닌 더욱 많은 협력 사업을 해낼 것이다. 또 현지화 전략도 주효했다고 본다.”

- 현지화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선박 수주계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난 1년간 평균 2주(週)에 한 차례씩 볼가발틱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러시아에서 사업하려면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에 회사 고위 관계자들의 생일도 직접 챙기고, 이들의 자녀를 현대종합상사의 직원으로 임용해 관계를 다졌다. 또한 러시아 회사 관계자들의 한국 조선업체 견학도 주선하는 등 인내심을 갖고 1년여의 시간을 투자했다.”

- 다른 한국 기업들도 러시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보나.

“물론이다. 조선 산업만 보더라도 한국 기업들은 2~3개월에 한 척을 건조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 척을 건조하는데 러시아는 1년, 다른 나라들은 적어도 6개월이 소요된다. 그만큼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다.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권경복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