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재계에서는 컴퓨터업체 휴렛패커드(HP)의 불법 전화 통화 조사 사건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이 사건은 HP 회장의 사임까지 몰고 왔고, 캘리포니아주 검찰청과 미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받고 있다. HP의 패트리셔 던(53) 전 회장이 캘리포니아 검찰로부터 소환 조사를 받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해 2월 HP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쫓겨난 칼리 피오리나(52) 전 회장이 최근 자서전을 펴내면서 HP 내부의 지저분한 암투 전말이 공개돼 신뢰 경영을 강조해온 HP의 치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HP의 던(53) 회장은 지난 9월22일 회사 기밀 유출자 색출을 위한 불법 통화 내용 조사 스캔들의 책임을 지고 전격 사임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칼리 피오리나 회장 및 CEO의 뒤를 이어 회장에 오른 던 회장은 이날 이사회의 정보 유출 장본인을 색출하기 위해 고용한 사설탐정들이 월권행위를 했다고 사과한 뒤 이같이 밝혔다. 던 회장은 회장직 사임 후 이사로서만 활동할 계획이었으나 캘리포니아 검찰청이 그를 기소하면서 이마저 물거품이 됐다.

HP 대변인은 “주 정부와 연방 정부의 조사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던 의장이 자발적으로 물러나기로 했다”며 “던 의장은 이사들의 통화 기록이 면밀히 검토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기록들이 불법적으로 입수된 것인지는 몰랐다”고 해명했다. 마크 허드 사장이 회장직을 승계해 회장 겸 CEO에 올랐지만 허드 역시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HP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스 글로벌 인베스터스 CEO 출신인 던은 지난 1998년부터 HP 이사로 활동했으며, 피오리나 사임 이후 이사회 의장을 맡아 왔다. 던은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파워 여성 100위 중에서 17위에 오른 바 있다.

이번 스캔들은 지난해 2월 칼리 피오리나 전 회장 겸 CEO의 축출 과정에서 비롯됐다. 피오리나가 이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회사의 장기 전략도 잇따라 유출되면서 회사 내부 정보를 누군가가 누설하고 있다는 의혹이 생겨났다.

던 회장은 올 1월 장기 전략 관련회의의 내용이 또다시 언론에 공개되자 유출자 색출을 지시했다. 던 회장은 피오리나 전 회장을 축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던 회장이 이사회 회의록 유출의 주범을 찾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해 이사들의 개인 통화 기록을 입수하면서부터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사설탐정들이 프리텍스팅(pretexting)이라는 불법적인 자료수집 방식을 사용해 이사들의 통화 내역을 입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프리텍스팅이란 본인인 것처럼 신분을 위장한 뒤 특정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 연방법은 금융 관련 기록을 열람하기 위한 프리텍스팅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화 통화 기록은 법 적용이 다소 애매한 편이라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피오리나 ‘자서전’ 겹쳐 내홍 확산

몇 달간의 조사결과 HP는 조지 키워스 이사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이사회에서 즉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HP는 그동안 모두 10건의 정보 유출 사실을 확인하고, 이 가운데 7건이 키워스와 관련 있다고 판단했다. 키워스는 유출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스스로 사퇴하지는 않겠다고 맞받았고, 이에 HP는 지난 10월6일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키워스 이사를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면 재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와중에 키워스의 사임 문제를 둘러싸고 또 다른 이사인 억만장자 톰 퍼킨스가 패트리샤 던 회장의 문제 처리 방식을 놓고 반발해 지난 5월 회사를 떠났다. HP는 퍼킨스의 사임 당시 회사와 의견 차이로 떠났다고만 설명했지만, 이후 퍼킨스의 주장이 대외적으로 공개되면서 회사의 도덕성은 도마 위에 올랐다.

전설적 벤처 투자가이기도 한 퍼킨스는 이사직 사임 이후 자신의 통화 기록이 HP에 의해 해킹 당했다고 주장했다. 퍼킨스가 HP를 강력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사건은 점차 ‘HP 스캔들’로 번졌다. 외부에서 영입한 조사요원들이 전화국에 신분을 사칭해 이사들과 출입기자들의 통화 내역을 입수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키워스와 퍼킨스는 HP 공동 창업자인 데이비드 패커드가 생전에 총애하던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던 회장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문이 확산되자 미국 금융 감독 당국이 조사에 나섰다. 결국 HP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설탐정을 고용해 이사진과 CNET뉴스닷컴, 월스트리트 저널 등 기자 9명과의 사적인 통화 기록을 입수한 사실을 시인했다. 최장기 HP 이사로 재직해온 조지 키워스 이사도 지난 1월 CNET뉴스닷컴에 게재된 HP 관련 기사의 ‘취재원’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이사에서 물러났다.

SEC에 이어 캘리포니아 검찰, 미 하원 에너지 및 상업위원회, FBI도 잇달아 조사 방침을 밝히고 나섰다. 빌 로키어 캘리포니아 검찰총장은 “우리는 현재 HP 내부와 외부 인력들을 기소할 만한 증거를 충분히 확보했다”며 “이번 사건은 분명히 범죄”라고 강조했다. 그는 ID 도용과 컴퓨터 기록 불법 접근 등 2건의 범법 행위가 있었다고 밝혔다. 컴퓨터를 활용해 불법적으로 개인 인증 정보에 접근한 것과 이 정보를 불법적인 목적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최고 징역 3년 형에 10만달러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HP의 사생활 침해 여부를 수사 중인 캘리포니아 검찰은 통화 추적을 지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HP의 최고위 간부들에게로 수사를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미 하원도 던 회장을 직접 청문회에 출석시켜 사건 전말을 조사했다.

새로 회장직까지 겸하게 된 허드 사장 겸 CEO는 “HP에서 부적절한 조사 기법이 다시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상응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허드도 당시 불법 조사 사실을 알면서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책임론이 제기돼 그가 HP의 재건을 주도해 왔지만 장래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다. 허드 사장은 작년 4월 취임 이후 HP 주가를 85%나 끌어올리고 올 2분기 순익을 13억8000만달러까지 늘리는 등 HP 회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만일 그가 불법 행위에 연루됐을 경우 HP는 또다시 소용돌이에 휩싸일 전망이다. 문제가 된 불법 조사 사실을 허드 사장도 알고 승인한 것으로 드러나, 불똥이 그에게도 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허드 사장이 초기 단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동을 걸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그 역시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칫 그의 CEO직도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허드가 자신이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중단시키지도 않은 불법 조사에 따른 스캔들로 시련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HP 측은 허드 사장이 불법 조사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사외이사들이 조사를 관장했다고 밝혔다. 로버트 셔빈 HP 대변인은 허드가 불법 조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3월 조사 결과를 검토하는 자리에서였으며, 따라서 조사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알고 있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즉, 이번 조사에 ‘부적절한 방법’이 동원됐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뿐 초기 단계에는 전혀 몰랐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 기업윤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조사 과정에서 개인통화 기록 입수 사실을 허드가 알았다면 조사를 중단시켰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HP의 대표적인 경영이념은 다름 아닌 신뢰경영을 뜻하는 ‘HP Way’다. 직원들에게 부여된 권한과 경영자들의 믿음으로 요약되는 ‘HP Way’가 경영진 간의 불신, 통화 기록 빼내기 등 추악한 스캔들로 멍들어 버렸다. 더욱 가관인 것은 던 전 회장이 최근 미 하원 청문회에 출석, “정보 유출자를 찾아내기 위해 기자들에게 거짓 이메일을 보낸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밝혀, 그의 도덕적 가치관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또 이번 사건에 대한 HP의 대응 역시 기업 신뢰도를 완전히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HP 측은 이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사설탐정들이 전화 기록을 빼내기 위해 활용한 프리텍스팅 수법은 불법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불법 여부를 떠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HP는 또 퍼킨스가 이사회에서 전격 사임했을 때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밖에 허드 신임 회장이 불법 행위를 직접 승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가 거짓말로 드러나 HP의 신뢰는 이래저래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최우석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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