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겨울이 왔다. 각국은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겨울이 달갑지 않다. 당장 에너지 걱정도 문제지만 그보다 에너지 수급 걱정이 앞서고 있다. ‘북극곰’, 러시아 발 천연가스 폭풍에 대한 우려에서다. 유럽은 러시아가 올 1월1일을 기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했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나흘 동안 계속된 가스 공급 중단은 유럽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에너지 안보’가 발등의 불로 다가온 경우였다.
러시아는 11월에 들어서자마자 옛 소련 국가들을 상대로 ‘가스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올 가스 폭탄의 첫 대상국은 그루지야.

가즈프롬은 지난 11월2일 현행 1000㎥당 110달러인 가스 값을 내년에 230달러로 인상하겠다고 통보했다. 지난해도 63달러에서 110달러로 인상했었다. 2003년 민주화혁명(장미혁명)으로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탈(脫)러시아 친(親)서방정책을 추진한 게 러시아를 자극했다. 이미 지난 1월에도 우크라이나에 이어 러시아로부터 가스 공급 중단 조치를 당한 바 있다. 그루지야가 친미 정책을 추진하자 손보기에 나섰던 것이다. 러시아는 그루지야산 포도주와 광천수 수입도 금지했다. 그루지야 생산량의 60%인 1억4000만 병에 이르는 포도주와 전체 수출량의 80%를 차지하는 미네랄워터 ‘보르조미’에 대한 러시아의 금수 조치로 그루지야는 국가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양국은 가스 가격 문제로 긴장관계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주라브 노가이델리 그루지야 총리는 “이번 조치가 이 지역 모든 국가들에 적용되는 상업적 가격이라면 수용할 의사가 있지만, 그루지야에 대한 차별적인 조치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루지야는 당장 터키, 아제르바이잔, 이란에서 가스를 도입하기 위해 협상을 벌여야 할 판이다. 그루지야는 올 초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일시 중단되자 35년 만에 이란으로부터 가스를 수입하면서 1000㎥당 233달러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러시아의 손보기 대상 2번 타자는 벨로루시. 러시아 국영기업인 가즈프롬은 11월4일 벨로루시에 대해 1000㎥당 48달러인 현재의 가스 공급 가격을 내년부터 200달러로 인상하겠다고 통보했다. 인상률이 무려 420%다. 가즈프롬은 수출 가격 200달러 중 30%(60달러)는 관세라, 이를 제외한 실제 가격은 140달러로 서유럽 수출 가격 230달러보다 훨씬 낮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벨로루시에 대한 조치는 상당히 의외다. 옛 소련 국가 중 러시아와 절대적인 유대관계를 맺어 온 나라였기 때문이다. 올해도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몰도바 등이 다 러시아의 위협에 당했지만 벨로루시만은 예외였다.

벨로루시는 1000㎥당 겨우 48달러라는 헐값에 가스를 제공받았다.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 등과 비교하면 3분1 수준이었다. 러시아가 이런 벨로루시에 ‘가격 인상’을 통보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러시아와의 국가 간 통합에 미온적인 게 이유로 알려졌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최근 ‘러시아와 체결한 연방국가 합의’ 파기 발언을 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다. ‘3선 금지’법으로 차기 대선 출마를 못하는 푸틴 대통령은 양국이 통합하면 통합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러시아는 또 그루지야처럼 탈러시아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몰도바에도 현행 110달러 선에서 내년부터는 160달러로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양국은 몰도바가 자국 내 친러 자치공화국 ‘프리드네스트로브’에서 지난 9월 실시된 주민투표 결과 ‘독립 희망’이 압도적이었는데도 이를 몰도바가 무시하고 있는 데 문제를 삼고 있다.

유럽 각국은 당장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내년도 가스 공급가가 어찌될지 초미의 관심사다. 하지만 러시아는 일단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현행 130달러 선에서 가스를 공급하기로 했다. 당초 내년부터 230달러로 올릴 계획이었으나, 지난 3월 총선에서 승리한 친러시아 성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총리에 오르자 러시아는 그의 입지를 적극 감안, 가격 인상을 유보했다. 일단 우크라이나는 화를 모면한 셈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EU(유럽연합)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고 나설 경우, 가스 가격은 다시 양국의 최대 이슈로 부상할 전망이다.

유럽 국가들은 옛 소련 국가들이 2007년 가스 공급가 문제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당장 올 초에 이어 또다시 가스 수급 불안에 직면할 판이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가 아닌 벨로루시가 핵으로 떠올랐다. 러시아의 대유럽 가스 공급의 20%가 이곳 가스관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가스관을 통해 유럽 공급량의 50%를 공급하고 있는 데 이어 벨로루시 역시 대유럽 가스 공급 통로로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는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계산이다. 옛 소련 국가에 대한 압력과 달리, 자국에 우호적인 국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독일에는 직통 파이프라인(북유럽가스관 : NEGP)을 건설해 가스 공급을 늘리기로 했으며, 중국에는 사할린 1공구에서 생산된 천연가스 약 600만 톤(액화 천연가스 환산)을 ‘중국 석유천연가스집단회사(CNPC) 측에 수출하기로 계약했다. 더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10월12일 독일을 방문, NEGP를 통해 바렌츠해 ‘슈토크만’ 가스전에서 생산한 가스를 직접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미국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슈토크만 가스전은 3조2000억㎥ 규모의 천연가스 매장지로 당초 러시아는 2010년 채굴을 시작해 50년 동안 미국에 공급할 예정이었다. 이미 러시아는 지난해 9월 미국의 셰브론과 코노코필립스을 가즈프롬 협력 대상으로 선정했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이 러시아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에 제동을 거는 등 양국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에 불이익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가즈프롬은 지난 4월에도 영국 정부가 가즈프롬의 영국 최대의 가스 공급업체인 ‘센트리카’ 인수를 막기 위해 관련 규정을 바꾸려 하자 유럽에 대한 가스 중단 카드를 들이밀었다.

지난 10월20일 EU 25개 회원국 정상들은 핀란드 라티에서 에너지 안보 문제를 비롯한 현안을 논의했다. 사상 처음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만찬모임에 초청됐다. EU 정상들은 그와 에너지 등 경제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정초 가스 공급 문제로 에너지 안보 위협을 느낀 각국은 ‘러시아 눈치 보기’에 여념 없었다. 러시아 에너지 공포는 옛 소련 국가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게도 공포로 다가왔다. 서방 국가들 사이에는 에너지를 무기로 삼고 있는 러시아와 공존하기 위해 ‘조심스러운 연대(wary engagement)’ 정책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스 가격 문제는 가즈프롬이 가스 독점사라는 지위를 이용,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알렉세이 포체프킨 가스프롬 국장은 “가스 가격은 가스관의 길이, 가스관의 종착지에 따라 다르지만 수출가는 국내 공급가보다 50% 이상 비싸게 공급된다”며 “생산비용과 가스관 수수료를 계산해 책정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옛 소련 국가들이 그동안 공급가 혜택을 받아왔지만, 이제 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각국 언론과 에너지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에너지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데 대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조나단 스턴 옥스포드 에너지연구소장은 “러시아의 에너지 정책은 일방적일 수 없다”며 “러시아 역시 유럽이 가장 안정적인 에너지 구입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NEGP 건설 등에 필요한 100억달러 이상의 재원 마련을 위해서도 유럽 국가와 협력이 필요할 것이기에 가스 공급 중단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가즈프롬은 가스 판매로 2005년 257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는 가즈프롬 수입의 65%를 차지했고, 수출 비중이 62%였다. 결과만 보더라도 가스 수입국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EU 회원국의 전체 에너지 비용에서 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37%로, 석유 18%, 고체연료 15%, 원자력 6%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러시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모스크바 = 정병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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