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가 인정하는 ‘아시아 최고의 글로벌 금융 도시’인 홍콩에 때 아닌 ‘주변화(周邊化·marginalization) 위기론’이 엄습하고 있다. 1997년 중국으로 주권 반환 무렵 반짝했던 ‘홍콩 침몰론’이 9년여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골자는 간단하다. 홍콩 정부와 시민들이 잠깐 방심했다가는 홍콩이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본토와 상하이(上海)·선전(深  川)·광저우(廣州) 같은 경쟁도시들에 밀려 일개 변방도시로 추락할 것이라는 걱정이다.

실제 홍콩의 위상이 위협받고 있는 징조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홍콩의 양대 경제 생명줄인 물류와 금융 부문에서 특히 뚜렷하다. 물류의 경우, 선전·광저우 등에서 항만과 국제공항 증설을 잇달아 하면서 홍콩의 눈부신 성장세는 크게 주춤거리고 있다.

일례로 홍콩항에서 화물을 싣는 것보다, 선전의 옌톈(鹽田)항 등에서 선적을 하면 40피트 컨테이너당 200달러 정도를 절감(미주 항로 기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최대의 수출 지대가 위치한 광둥성 등 남중국에서 미주와 유럽 항로를 이용하는 해운 물동량에서 홍콩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75%에서 지난해는 40%로 급락했다.

컨테이너 처리 물동량만 보면 싱가포르가 1위를 차지했고 홍콩은 2위로 밀렸다. 연간 물동 처리량 증가율도 홍콩항이 2~3%에 불과한 반면, 선전·광저우·상하이항은 최소 24~50%에 이른다.

홍콩 총상회의 로빈 추이 사무총장은 “상품 및 원료 공급 체인으로서 홍콩이 사실상 독점하던 해상 항로 요충 기능이 소멸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맥킨지 컨설팅은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홍콩시민 18만 3000명이 실직해 120억달러(약12조원)의 경제적 손실이 예상된다고 진단하고 있다.

세계적인 물류업체인 UPS의 량궈치(梁國基) 아태본부 사장은 “인력과 인프라, 제도적 시스템 등은 아직도 홍콩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지만 인건비 등이 중국의 배 이상 비싸 경쟁력 약화 요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공항도 하루 평균 720대가 이착륙하는 홍콩의 첵랍콕국제공항은 포화상태에 이른지 오래이다. 선전은 물론 광저우의 바이윈(白雲), 주하이(珠海)와 마카오까지 국제공항 증설 붐을 벌이면서 홍콩의 독점적인 위상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정·재계 대응 방안 모색에 총력

금융업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상하이에 이어 중국의 ‘1호 경제특구’인 선전이 올 들어 ‘금융 중심’을 표방하며 홍콩에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쉬쫑헝(許宗衡) 선전 시장은 4월 들어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홍콩을 직접 방문, 홍콩 금융기관들을 상대로 선전 유치 활동을 벌였다. 선전시 정부 측은 푸톈(福田)구·난샨(南山)구 등 4개 지역에 금융특별구역을 지정하고 세금 인하, 특별 장려금 200만위안(약2억5000만원) 일시불 지급 같은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선전의 금융업 수준은 홍콩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제조업 고도성장이란 성공신화를 가진 선전이 중앙과 지방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돌진할 경우, 홍콩 따라잡기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여기에다 다이상룽(戴相龍) 전 인민은행장이 이끄는 톈진(天津)시도 북방의 푸동(浦東)을 표방하며 ‘금융 중심지’ 육성에 나서 홍콩을 긴장시키고 있다.

홍콩의 한 금융 전문가는 “상하이, 선전에 이어 북방의 톈진까지 빈하이(濱海) 신구(新區)에 금융 중심을 세우면 그 만큼 홍콩의 입지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의 정·재계와 관계 지도자들은 온통 주변화 위기론을 설파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총대를 가장 먼저 맨 인사는 라파엘 후이(許仕仁) 정무사장(국무총리 격). 그는 지난 3월 하순 “홍콩이 주변 도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공공지출 억제와 작은 정부가 불가피하다”고 시동을 걸었다. 이어 리카싱(李嘉誠) 허치슨왐포아 겸 청쿵(長江)그룹 회장이 “700만 홍콩시민이 합심해 대응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거들었다.

4월 들어는 조셉 얌(任志剛) 홍콩 금융관리국(중앙은행 격) 총재가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에 대한 중국 본토 주민들의 투자 허용, 홍콩 금융기관들의 적극적인 중국 내륙 진출 같은 5개항의 극복 처방전을 내놓으며 절정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그러면 홍콩의 실제 상황은 심각한 주변화 위기를 호소할 만큼 어려운 상황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은 절대 아니다’로 요약된다. 특히 올 들어 항성지수가 1만 6000을 돌파한데 이어 모건스탠리·바리바·씨티뱅크 등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연말까지 1만 7000~1만 8000선까지 상승을 점칠 정도로 경제 전 분야에 ‘파란불’이 잔뜩 켜져 있는 상태이다.

만성 적자로 허덕이던 정부 재정도 당초 목표를 3년이나 앞당겨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다. 경제 성장률도 2004년에는 8.3%, 지난해는 7.6%로 1997년 중국으로 주권 회복 이후 최고 수준을 구가하고 있다. 올해도 5~6%대의 견조한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어떻게 보면 ‘순풍에 돛단 듯 한 상황’인데도 지도자들이 ‘엄살’을 떠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전문가들은 정치 민주화를 내세우는 민주파 등의 요구를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돼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광속도’로 변하는 세계 경제에서 끊임없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 전문가는 ‘거안사위(居安思危:편안할 때 다가올 위기를 미리 대비한다)’적인 선제 대응 조치라고 풀이했다. 경제와 정치 모두 빵빵하게 잘 나가고 있을 때일수록, 허리띠를 더 바짝 조이고 10~20년 후를 준비하고 단점을 보완한다는 지도자들의 포석에 따른 계산된 발언이라는 설명이다.

하루하루 밥그릇 다툼과 표를 얻기 위한 정쟁(政爭)의 잔머리 게임에 빠져있는 한국의 지도층과는 여러모로 차원 자체가 다른 셈이다. 홍콩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의 수준과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 대응 양상에서도 한국보다는 한 수 위에 있음을 절감하게 되는 현장이다.